2022년 1월 2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 막 1장 15절; 신 16장 11절; 행 2장 4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교회는 반복적으로 고민해 왔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차원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분명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체성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공동체의 사명은 확실합니다.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사역의 현장인 세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자신을 내어주지 못할 때, 걷잡을 수 없는 비난이 쏟아지게 됩니다. 지난 2년간 지속된 코로나 팬데믹은 이런 한국교회의 허약한 부분을 강타함으로써 교회는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에 신속한 처방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 처방은 교회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교회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질문을 몇 가지 던져봅니다. 교회를 진정 교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의 가치는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교회공동체가 왜 중요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과 소통하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해야 소통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소통은 공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교회는 마치 세상에 대한 공감의 다리를 끊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교회를 보면 자기만의 정답을 갖고 있어서 그래서 항상 자신의 정답을 제시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 드리라고 주장합니다. 쓰나미가 몰려오고,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과 질병 등 불행한 사건이 닥칠 때마다 교회는 쉽게 판단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상의 땅을 심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죄와 판단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선 교회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 앞에서 먼저 통회자복하며 “왜입니까?” 몸부림쳐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왜라는 질문에 함께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상황을 경험해야 하는 건가요?” “하나님,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대한 답을 얻지 못할 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왜라는 질문에 쉬운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질문과 함께 몸부림쳐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될 때까지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공감하며 아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하면 열심히 봉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비춰지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시작된 왜곡입니다. 복음은 부와 소유, 치유와 기적, 번영과 행복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되면 축복이고 잘 안 되면 저주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근본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나의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했던 나의 교만함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복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말하였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활성화되며, 교회다운 교회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새롭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에게서 드러나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핵심은 복음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복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복음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세상을 달라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서 떠나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그의 나라를 이루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살 때에만 세상은 교회에 이끌립니다.
복음의 본질에서 비켜나 있다면 교회는 교회로서 이 세상 속에서 그 어떤 역할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했던 길을 다시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교회의 주되심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교회가 머리 되신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 안에 있을 때 교회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있어서입니다.
이처럼 복음으로 교회가 새롭게 될 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 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의 놀라운 결실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비난받을 때는 교인 수가 우수수 떨어지곤 했습니다.
교회는 다른 것을 통해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삶으로 증거하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입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뒷받침되는 증인이어야 합니다. 삶과 고백이 심각한 괴리 상태에 있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삶과 믿음의 고백이 일치하는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런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상부상조하며, 거룩한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읽혀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꿈꾸는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을 소망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원함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발이 둥둥 떠다니는 구름 잡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신앙의 공공성을 이루어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16장 11절로 드러납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옛날 사회와 지금의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계급화되어 있고, 인종적으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악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악한 모습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떤 자리이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영문 밖으로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 자신을 드려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 쪽방에 사는 이들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을 잠깐 시청하였습니다. 소외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들을 돌보고 있는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이셨어요.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외된 이들 틈에 들어가 아직도 긍휼의 마음으로 서 있는 분들을 보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작은 자를 향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신 것을 보시고 주님은 그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지난 25일 성탄절 오후 봄봄 자원봉사단과 바라카 도서관, 6개의 교회가 협력하여 이주민 아이들을 위한 성탄절 파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체들이 모여 함께 아이들 간식을 준비했습니다. 사진을 통해 그날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섬김으로 저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것이 계속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또한 가졌습니다.
소외된 자, 작은 자들에 관한 관심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약자들을 향해 나누어줄 수 있도록 관심을 두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대변되는 연약한 자들에게 공동체의 도움을 주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공동체도 나눔공동체를 통해서 늘 가져갔던 마음입니다. 봉사와 구제와 헌신에 저들은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았던 겁니다. 이것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곱 집사를 두기도 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처럼 복음 안에 서 있는 교회는 공적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로서 서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온 세상,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있어서입니다.
딤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에 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누리는 ‘영적 공공선’을 먼저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에 기초하여 인간이 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될 때 누리는 것이 ‘사회적 공동성’이라고 보았습니다. 복음은 개개인을 위한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이와 우주적 차원에서 기쁘고 복된 구원의 소식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공동선의 구현을 위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고, 섬기고 변혁에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포기하고 높은 담을 쌓고 꼭꼭 숨어버린다면 공공의 적이라는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선물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주님의 마음으로 나아갈 때만이 이 땅에 하나님 영광의 충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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