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일
[비판하지 말라: 마 7장 1-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극대화하면서 자기 잘못은 슬쩍 덮고 가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언제나 엄격한 검사가 되고, 자신에게는 최고의 변호사가 됩니다. 이렇게 오만과 편견의 잣대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대하고 사는 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회 지배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기독교적 대항문화는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와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인은 은둔자가 아닌 마을과 가정 등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그곳을 비추는 빛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역할이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초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여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관계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의 잣대로 똑같이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집중적으로 나누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과 외면의 세계가 세상과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타자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를 갖고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보통 ‘비판하다’라는 말은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런 비판적 분별력이라면 바른 질서를 위해 당연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판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금하신 것은 소위 검열관 같은 비판입니다. 과거 독재 시절 검열관들은 영화, 책, 신문 기사 등을 그냥 난도질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검열관과 같은 특성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개선 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실수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흠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동기에 대해 가능한 최악의 분석을 하며, 그들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고 그들의 실수에 대해 극도로 인색한 비판을 예수님은 멈추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체와 이웃을 죽이는 일이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도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그렇지 못한 군중을 대할 때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이 천박하다고 여겨 아주 가혹하게 비난하고, 자신의 명성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 남을 헐어 내리는 비난이 난무했던 겁니다. 남을 쉽게 정죄하고, 죄인 취급하는 행동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겁니다. 저들처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판을 너무도 쉽게 자행합니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비판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잘 모릅니다. 남도 죽이는 일이지만 실은 자기도 죽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 비판의 화살이 결국에는 자기를 향해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신 겁니다. 당연히 사람들에게서 비판을 되받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돌아올 심판입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상처 주고, 헐어 내리고, 정죄하고자 하면, 그런 행동의 결과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물으실 겁니다. 우리가 타자를 향해서 해야 할 행동이 아니어서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나 자신을 그의 감독자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사람 앞에 선 재판관이 아닙니다. 인간을 선악 간에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은연중에 하나님처럼 되려는 외람된 생각,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황금률의 부정적인 적용으로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사람의 마음은 거의 같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신랄하게 비판하면 기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속으론 불편해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 때 갚아버립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리를 끊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으니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우받고 싶지 않은 그대로 남을 대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감히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욱 엄격하게 판단 받아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수 있는 겁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자기가 재판관처럼 행세한다면 그 헤아림의 칼날은 어느 순간 우리를 헤집고 들어올 것입니다. 자리가 피고인석으로 바뀌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심히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지는 그의 모습 속에는 더 큰 악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남들은 보아 알고 있는데 자기만 알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커다란 문제는 안중에 없고, 상대방에 작고 사소한 문제를 지적하고, 정죄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가 실은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들보 같은 죄를 품고 살아가면서 자신은 안 그런 척하면서 상대방의 작은 허물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티와 들보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티는 지푸라기나 겨의 작은 조각 정도를 말합니다. 아주 작은 크기입니다. 반면에 들보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 정도로, 현대식 건물에 강철 에이치 빔을 연상하면 될 겁니다. 이 이야기는 실로 코믹한 상황입니다. 남들이 볼 때 자기 눈엔 강철 에이치 빔이 툭 튀어나와 볼썽사나운데 다른 이들의 사소한 잘못에 미주알고주알 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이런 자들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중한 잘못은 전혀 다룰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잘못에 간섭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7:5a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자신은 대들보와 같은 중한 죄의 짐을 지니고 다니면서 형제의 티를 빼려고 시도하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 일입니까? 그러니 먼저 시급한 자기 죄부터 해결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선 어떤 말도 사랑과 긍휼의 마음에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는 쉽사리 발견해내면서도 자신의 죄는 간과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이처럼 자기 눈에 대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의 작은 티끌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의 관계,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어그러지게 만들어 버릴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죄를 먼저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교정하라고 하기 전에 자기부터 교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마 7:5b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이처럼 들보를 빼내어야 밝히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연유에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1절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모든 비판을 삼가거나, 진실과 오류, 선과 악을 분별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정직하지 못하고 외식적인 행동이라고 보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만의 규범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겁니다. 더욱이 그들 속에 온갖 더럽고 추악함이 있었지만, 가식적인 종교적 행동으로 슬쩍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선 숨길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의를 능가하지 않고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바깥세상을 향해 뭔가를 외치고 행동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경건함에 있어서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생명의 삶이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매일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긍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품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미약한 이들의 짐을 함께 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합니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외식하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여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들보를 빼낸 다음에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형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겸손과 회개와 감사의 태도를 지닌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나누지 않고, 그에 참여하지도, 그 방법대로 살지도 않는다면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참여하거나 응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기적인 선택을 내려놓고 긍휼과 사랑과 용서, 관대함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향해 용납과 긍휼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에게서 반드시 영적으로 선을 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실은 내 눈에 들보를 빼내고 형제의 눈에 티를 빼낸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만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 아닙니다. 형제도 분명 죄의 대들보가 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말 몇 마디로 해결되는 차원이 아닙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며 무릎 꿇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너 잘해 그게 문제야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완강하게 저항하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곤 합니다. 그런 때 싸워 이기려고 전의를 불태워야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완악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완악한 영혼을 버리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앞에 하신 주님의 말씀과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내하시며 참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인내하며 참는 것을 배우게 하는 말씀입니다. 굳게 닫힌 문을 의미 없이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령님이 어떻게 어디에서 길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알기 위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님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책망이 그냥 흩날려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잠언 9:8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린다면 우리는 그들과 계속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단계입니다. 우리의 통상적인 임무는 다른 이들을 인내하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내하고 견디셨던 것처럼 말입니가. 우리는 오직 형제를 살리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린 검열관도, 재판관도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런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했다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처음 인간은 넘어졌습니다. 그 길을 단호하게 거절하십시오.
사람을 살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갑시다. 내 짐을 잘 지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걱정하다가 직무유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갈 6:4-5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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