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1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세상이 새로워지는 관계의 원리(1): 엡 5장 21-33절]
이 땅을 산다는 것은 수많은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나와 너의 관계로 일상에서 부딪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괜찮은 나와 너가 만나면 시너지가 나고 행복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일상은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관계의 모습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완벽한 관계 형성은 불가능해보입니다. 그 관계가 수시로 깨어지고 있어서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는 자기 중심적인 죄성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입니다. 많은 만남이 이기적인 발로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시작되었다가 그 일이 아무래도 성취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그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자기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대 정신이 특히 더 그렇습니다. 따뜻한 정보다는 냉냉함이 흘러넘치고 있어요.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소중한 공동체와 삶의 자리들을 어떻게 지켜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준비된 나를 통해서 너에게로 흘러갈 수 있는, 세상의 것과는 분명 다른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산다고 하면서 기존의 질서와 행동, 가치관으로 이 땅의 관계를 이루어가고 있다면 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지체들이 몸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교회라면 그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혀 보여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교회를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런 연유로 기존의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와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고 하나님 백성의 지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1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관계의 기본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 복종은 어느 한 사람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방적 복종이 아닙니다. “피차 복종하라”고 했듯이 상호존중의 관계를 말하고 그 존중에 대한 기준은 “주께 하듯 하라”에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경외함으로 그분게 순종하며 따랐던 진정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종처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경외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여러 관계 안에서 “주께 하듯 하라”는 원리를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이룰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아내, 자녀, 종이라는 특정한 위치 안에서 예를 들고 있지만,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모든 관계로 확장해서 적용할 수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타자와의 관계를 온전하게 세워가는 원리가 됩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가장 먼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도전은 가정의 해체입니다. 가정의 의미는 지금까지의 보편적인 이해로 바라볼 때 너무도 쉽게 깨어지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들이 어그러지고 있어요. 여기 이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그리스도인이기에 다른 차원의 접근과 차별한 된 행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주께 하듯 하라”는 원리와 함께 부부 사이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서 풀어가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또 다른 중요한 원리를 찾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아내가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 자매님들은 이 말씀에 쉽게 아멘 할 수 있으세요. 머리 됨이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면 쉽지 않겠지요.
흔히 사람들은 머리 됨이라는 표현에서 상하 종속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물리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됨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몸의 구주가 되신다는 표현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몸 된 교회를 구속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은 물리적인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써 이루어진, 그래서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 임을 부각시키고 있어요.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해야 함을 뜻하고, 지배가 아닌 아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남편이 취해야 할 아내에 대한 태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을 때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았을 때 이루어지는 일회적 행동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도 매순간이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22절에 대한 말씀이 이해 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인 남편의 이런 모습이라면 그리스도인 아내의 입장에서 22절의 말씀에 “예스” 하고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하지만 이 가치를 알지 못하는 남편에게 22절의 말씀대로 가능하겠습니까? 군림하려고 하고, 책임감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남편에게 어떻게 이리 행동할 수 있을까요?
22절 말씀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을까요? 헬라어 원문에는 실은 “복종하기를” 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 21절 말씀인 ‘피차 복종하라’는 말과 의미적으로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21절의 “피차 복종하라”는 말은 성령충만한 4가지 결과에도 연결되면서 22절부터 이어지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또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22절의 키 포인트는 “복종하라”는 말에 있기 보다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에 강세가 있습니다.
교회의 구주가 되시기에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 분의 통치 안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처럼 아내들도 주께 하듯 범사에 자기 남편에 복종하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권위적이고 강압적 복종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상호존중에서 그리고 남편의 희생과 책임이라는 몫 위에 더해지는 아내의 존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복종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4절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반대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가 복종이라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라의 헬라어 ‘아가파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이기적이며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것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언제나 아내를 사랑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무조건적이며 자기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은 자신의 몸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즉 남편은 자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사랑하며 아내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채워주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아내에 대한 남편과 아내의 행동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안에서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보살피셨던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고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자기 희생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아내가 복종한다는 의미도 헌신적인 자기 희생의 한 측면입니다. ‘복종한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랑한다’는 말도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복종과 사랑은 같은 맥락입니다. 자기 희생의 다른 두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포기한다면 상대방을 높이 평가해서 그 사람이 자아를 더욱 온전히 개발하도록 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고자 할 때만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그의 자아를 찾도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각자는 남녀의 조화로운 상호 보완 관계속에서 상대방이 더욱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와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는 가정하에서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로 하여금 가슴앓이하게 하는 관계들은 늘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괴물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희생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설령 부족하여도 한 영혼을 우리가 진정 사랑하고자 한다면, 아니 긍휼히 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참아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였고 교회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 떤 것으로 인한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쓸모 없음과 누추함에도 경건치 않은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오직 우리를 위해 그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구원을 얻었습니다. 거룩한 공동체로 서게 된 것입니다.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희생적이고 섬김의 사랑이 상대방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 없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주께 하듯 한 영혼을 향한 마음을 쉽게 내려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채우시는 기적을 맛보게 될 수 있음을 믿고 이 길에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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