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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술취함과 성령충만: 엡 5장 18-21절

by 최수근 2021. 7. 5.

2021년 7월 4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술취함과 성령충만: 엡 5장 18-2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잊을 만하면 방송 매체에 프로포폴이란 의약품이 유명연예인이나 재벌가의 사람들과 관련되어 이야기 되곤 합니다. 프로포폴은 향정신성 의약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대놓고 마약을 할 수 없으니까 치료라는 핑계로 이것을 맞는 것 같습니다.

중독은 오늘 현대인들을 옭아매는 치명적인 덫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독은 물질중독과 행위중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질중독은 주로 알콜, 담배, 필로폰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중독을 말합니다. 행위중독은 인터넷, 스마트폰, 도박, 게임 중독 등을 말하죠. 이 중에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 중독은 우리나라 4대 중독으로 손꼽힙니다. 이런 중독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중독의 수준은 아니라 해도 우리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무디어지게 하고 억제하는 것들에 혹 빠져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컨트롤하고 있어.” 그러나 그 무언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해서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닐까요? 중독의 문제는 구원받은 이후에 심각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에베소의 상황에도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영역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술과 관련됩니다. 어쩌면 술이 당시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즐길 수 있거나 탐닉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으니까요?

사회적 배경이 그렇듯이 종교적 배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헬라 세계의 사람들은 쾌락을 위하거나 근심에서 벗어나고자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신과의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누고 신비한 지식을 얻고자 술에 흠뻑 취하였습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 로마신화에는 바쿠스라고 하는 신을 위한 제의가 행해졌는데 여기에는 현란한 춤과 노래, 음주와 환락이 동반됩니다. 제의가 절정을 이루면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들어 광란의 도가니가 되곤 하였습니다. 이런 종교적인 영향이 사회에 미칠 수밖에 없었던 때입니다.

이런 사회·종교적 배경에 살았던 에베소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술에 빠져 살던 자리에서 탈피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옛사람을 지배했던 것을 대체하는 강력한 새로운 힘이 필요했습니다. 과거 술에 취해 살아가던 자리에서 사람들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선 새로운 채움,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력한 경험이 주어져야만 했던 거죠. 그렇지 않고서는 과거의 중독성 있는 것들을 비어냈을 때 다시 그 자리로 회기 하려고 하는 몸의 습성을 따라 돌아가 버릴 위험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강력한 새로운 경험이야말로 성령 충만임을 선포하면서 더는 술 취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기에서 바울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비교하였습니다. 둘의 상태는 얼핏 보기에 유사하다고 할 수 있어요. 술 취한 사람은 알코올이 충만하여 취해 있습니다. 알코올의 힘에 지배를 받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취해 성령의 능력에 지배를 받습니다, 취했다는 점에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강림 때도 일부는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결과와 열매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술 취함의 결과는 방탕함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거칠고 방종하고 통제되지 않는 행동에 빠집니다. 그들은 짐승처럼, 사실상 짐승보다 못하게 행동합니다. 술에 취하게 되면 정신이 혼미하여 판단력이 흐려지고, 뇌의 평형감각을 주관하는 중추신경이 마비됩니다. 이렇게 무절제하고 혼미하게 되니 망가질 대로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취한 이를 지치게 만듭니다. 다 소진하게 만듭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술 취함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고전 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술 이외의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그래서 우리가 중독되어 있는 많은 것들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결국 다 내어주고 죽는 것이 끝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결과는 다릅니다. 우리를 다스리지만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힘을 주죠. 이기도록 만듭니다.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알코올이 인간을 비인간화하여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반면에 성령 충만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깨어나고 각성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십니다. 무엇보다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렇게 18절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 권면하면서 19-21절에 따르면 성령 충만에서 비롯되는 영적으로 유익한 네 가지 결과를 말씀하였습니다.

19a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서로 화답하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배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들의 영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함으로써 영적교제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써 예배 안에서 성도 간에 영적으로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지니 예배가 살아나는 것이죠.

19b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19절 상반절에서 시와 찬송과 산령한 노래들로 그리스도인이 서로 화답한 것이라면 19절 하반절은 믿음의 공동체가 산령과 진정으로 찬양을 주께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칠 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예배는 공동체적인 예배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불평은 결코 성령과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음에도 늘 불평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불평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은 겸손한 영이십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면 옛사람의 모습 속에 내재 되어 있는 공격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모습이 아니라 온유함과 겸손함과 친절함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명백한 특징 중 하나는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 앞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이들은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리 어렵게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낮아짐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은 모두 우리의 관계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과 또한 서로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예배할 수 있고, 서로 말하고 복종하면서 샬롬의 관계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에 취하면 하나님과 이웃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자기 세계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성령 충만 만이 이 문제를 넘어설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문제, 사회에서의 상하관계가 성령충만으로 인해 새롭게 될 수 있음을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옛사람의 삶에서 사로잡혀 던 것들에 취해 살 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방탕함으로 이끌어가는 술 취함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령에 취하는 길입니다.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케 하는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또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단 한 번 받으면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경험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믿고 순종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통해 계속 새롭게 되어야 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세례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리에서 이것을 이루어가는 힘은 우리의 내적 힘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견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고, 성령 충만은 매일, 하루의 매 순간 계속해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고, 새로운 본질과 새 마음과 새 패러다임과 새로운 모든 것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이성적이고 윤리적이 되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힘만 낭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본질로의 변화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진행될 것입니다. 성령을 떠나서는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 충만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란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성령 충만해야 모든 근심, 걱정,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이 성장할 것입니다. 이 모든 혜택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고 주가 기뻐하는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하여 세상으로 나아가 불의한 세상에 치명타를 날렸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나아가 구원의 역사와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 밖에 다른 것에 취하지 맙시다. 오직 성령 충만을 받읍시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삶의 변화와 함께,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우리 자신의 작은 변화로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역사와 변화의 꿈이 흘러갈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나를 통해 가정이 살 것입니다. 내 이웃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 물결이 커져 우리나라가 살고 나아가 세상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령 안에서 이 생명 살림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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