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주일설교동영상
[세상이 새로워지는 관계의 원리(3): 상전과 종/ 엡 6장 5-9절]
인간에게 인간관계는 행복과 고통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죠. 단지 귀찮고 어렵다는 이유로 관계 안에서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조율해가면서 성장해 가는 자신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점점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나와 너의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 때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타자로 인해 누리는 기쁨이 있는 것이죠.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관계 중에서 가장 복잡 미묘한 관계가 무엇일까요? 여러 관계가 있겠지만 저는 결혼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여가 만나 한 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사랑함도 있지만, 긴장과 오해와 분열이 가장 크게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친밀하면서도 긴장감이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평행선을 그어갈수록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관계 개선을 위해 사람들은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을 넘어 우리 인간관계에 급격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후 5:17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패러다임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행동해 왔던 기준이 변했다는 것이죠.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삶을 이야기하면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에 대한 핵심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로 적용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께 대한 마음과 행동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라는 권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 전체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거듭난 자신을 새롭게 그려낼 때 빛을 발합니다. 그 그림은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과 거룩하게 구별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는 가정 안에서 온전하게 구별되기 시작하여 사회 공동체로 향해 나갈 때 거듭난 한 사람으로 시작된 여정이지만 거기에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변화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가는 것이죠. 변화 앞에 선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에 균열이 일어나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같은 원리로 그 관계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에서 바울은 종에게 먼저 권면합니다.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그 당시 로마제국은 노예제도가 합법적인 제도였습니다. 추정하기를 6,00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했습니다. 분야에 따라 그들이 처한 환경은 각각 달랐을 것입니다. 다양한 노예들이 복음이 확장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거죠.
초대교회 안에는 주인과 종이 같이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예들이 많습니다. 물론 지배계층보다는 노예 계급의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선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억압적이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자신을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이끌어가고자 했습니다. 이 원칙은 상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통념에서 볼 때 상전과 노예의 상호존중, 즉 형제애는 과히 혁명적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이전까지는 종이든 상전이든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주님 앞에 서 있음을 자각하고 그 마음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21세기 우리 사회에 노예제도는 없지만, 현대에도 만만찮게 갑을관계로 묶여 있는 근로 현장이 많습니다. 특히나 지방에서 외국인들이 취업한 현장은 간혹 시사고발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보게 되면 현대판 노예들처럼 취급을 당하고 있어요. 죽어라고 일하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이런 현장이 쉽사리 개선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양한 산업현장에서 오늘도 많은 노동자가 재해로 죽어가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법이 제정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려 보입니다. 화이트칼라, 심지어 골드칼라 들도 연봉과 환경이 좋다고는 하지만 여기에도 다양한 압박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권을 찾아볼 수 없는 초대교회가 자리잡고 있던 로마 사회 속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였으니 말입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그것이 좋지 않다고 해서 거역하고, 그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노예들을 선동했다면 기독교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수없이 순교를 당했잖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개선되어야 할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먼저 새로워져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변화가 결국은 불합리하고 불의한 세상을 변혁시켜가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로 인해 세상은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변화를 요청하고 있나요? 교회 안에 있는 종들을 향하여 상전을 대하는 동기를 주님 대하듯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한 것입니다. 더는 주인 바라보지 말고 이제부턴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눈을 다른 사람들에게 둡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모든 삶이 사람들과 그들의 견해에 의하여 조종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사람의 지배를 받고 사람에게 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칭찬을 원하고 그래서 언제나 사람의 눈치만 살피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사고방식 전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젠 사람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주님 앞에 서는 시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종들에게 이와 같은 자세를 요구하고 있어요. 이 말씀은 오늘 다양한 사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유효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관계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동, 말, 마음,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어서 6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엡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 그리스도인에게 첫째 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마음으로, 다시 말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비롯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각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상황이나 환경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는 그의 지위와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가 종이든 상전이든, 그가 왕이든 신하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께 하듯 복종해야 하며 매 경우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행동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인은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 됨을 고백하고, 그의 보배로운 피로 갑주고 사신 바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에 의해서 명백해집니다. 이에 바울은 3가지 내적인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눈가림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늘 주님 앞에 자기가 서 있음을 자각하고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주요한 동기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모든 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엡 6: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첫째 되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우리의 시선이 주를 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가 우리의 심판자가 되시고, 우리의 행한 선에 대해 주께서 보상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23-24에서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바울은 상전들을 향하여서도 같은 원리를 권면함과 동시에 상전들의 무기를 내려놓도록 하고 있습니다.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 상전들 또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가 진정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 땅의 가치와 그것을 얻고자 하는 이 땅의 노력이 아닌 하늘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회 시스템을 넘어서서 한 생명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쉽게 할 수 있는 위협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을이 왜 갑에게 꼼짝 못합니까? 생존권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상호존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놀라운 명령입니다. 그건 종이든 상전이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한 지체이어서입니다.
기독교 기업의 기치를 내걸고 한 때 재계에 명함을 내밀었던 많은 기업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보다는 실패 사례가 많습니다. 저는 바울이 요구하고 있는 원리가 철저하게 스며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소규모 공장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갑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다른 거룩한 형식만을 보여 주면서, 예를 들어 직장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형식에만 서 있으면서 기독교 기업이려고 하면 그건 누어서 자기 얼굴에 침뱉는 격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고” 이 원리에 대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보증입니다. 한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식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의 일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녀들이나 그의 가정이나 그의 일상생활 모두를 말입니다. 그의 패러다임이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가 예배를 드리고 경건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의 일상의 대화나 그의 평소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그에게서 보는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그가 속한 모든 그룹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이 훨씬 유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는 오늘 어떤 능력을 갖췄든지 있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타자를 향하여 주님을 대하듯이, 주님을 기쁘게 하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간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머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예배요, 이것이 선교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거룩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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