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8일 주일설교동영상
[세상이 새로워지는 관계의 원리(2): 부모와 자녀; 엡 6장1-4절]
오늘은 세상이 새로워지는 관계의 원리 두 번째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 원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 “주께 하듯 하라”와 “그리스도가 교회에 하듯 사랑하라”는 부부 관계의 원리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함으로부터 시작되는 행동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술 취해 있으면, 자신의 것에 취해 있으면 타자를 돌아볼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타자와 더불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거기로부터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편과 아내로부터 시작해서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이 세워지고, 이 둘 사이에서 자녀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가정이 자라면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의 성장은 가정의 성장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4장 제2절에서는 결혼의 목적 중 하나로 거룩한 자손들을 통한 교회의 확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정이 온전하게 세워지는 데에는 큰 노력이 있어야 하죠.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사랑,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부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녀와의 관계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는 영역입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 온전하게 세워질 때, 가정 너머의 다른 관계들이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어서입니다. 건강하고 온전한 가정생활이 없다면 건강한 사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는 잘하다가 안에서 못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가는 비극입니다. 실은 쉬운 것만 택하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관계를 외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먼저 자녀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나이 불문하고 모든 자녀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일차적인 대상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 자녀들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의 네 번째가 엡 5:21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였습니다.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복종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6:1에서는 더 강한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바로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말씀하고 있듯이 자녀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옳고 의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회에서 표준이 되는 행동입니다. 고대 로마의 작가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어버이를 공경함은 으뜸가는 자연의 법칙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을 보면 당연한 일인데 당연한 것처럼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율법의 한 축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율법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자녀 된 우리들의 의무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율법입니다.
부부 관계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며, 부모를 통해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에 수많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그와 같은 관계를 전혀 볼 수 없고 오히려 막아버리는 비극적이고 어그러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아버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적인 도리에 의해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의무적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공경하라는 말은 “경외하라” “존경하라”는 의미입니다. 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권위를 자녀로서 인정하고, 그래서 부모님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사랑과 존경을 드리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부모의 자리가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가정 안에서 그 권위를 대행하는 부모를 공경하여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레위기 19:2-3 “너희는 거룩 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처럼 부모에 대한 공경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것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에서 필수불가결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책임과 의무로서만이 아닌 약속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엡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 말씀은 신 5:16을 적용한 것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이것은 단지 관계의 회복을 통해 한 개인의 잘 됨보다는 그것이 교회로 이어지고, 나아가 사회의 건강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확산하게 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무시하면 사회의 붕괴에 이르게 되는 율법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현시대의 사회상황 중 가장 위협적이고 위험한 국면입니다. 일단 가족 개념과 가정 단위 또는 가정생활이 무너지게 되면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해체 작업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부모에 대한 순종의 문제에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명령은 무조건적인가? 모든 부모에게 해당하는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로 인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 노력하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요구로 인해서 당장 직면하는 여러 문제로 당혹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하라는 것에 모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가?” “자녀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데 부모는 여전히 회심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부모가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금한다면 그 말에 순종해야 하는가?”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물론 골로새서의 유사 본문에서 자녀들에게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양심과 상식에 의해서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그 당시 로마 시대에 아버지의 말 자체는 법이었기에 절대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는 사형권까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주안에서”라는 명확한 단서를 달아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으로 균형을 잡습니다. 자녀들은 예외 없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차적 충성, 즉 그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양립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에 대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셨기에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가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속받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의 모든 동기는 “엔 크리스토”, 즉 “주 안에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이 기뻐하실 것을 하기로 갈망하는 것ㅇ죠. 그것에 반하는 일이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분명한 식별이 크리스천 자녀들에게 필요합니다. 게다가 어떤 곳에서는 절대적인 희생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주 안에서 순종하는 자녀에 대해 크리스천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대해야 하겠습니까? 이어서 바울은 부모가 자녀에게 행해야 하는 행동원리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자녀를 대하는 태도와 자녀의 양육방법에 대한 권면입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첫째로 부모를 향하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바울은 아이의 인격이 얼마나 민감한지 인식합니다. “파로르기제테”는 학대하거나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등 끊임없는 비난과 책망으로 낙담하게 만드는 의미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비일비재했던 일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삶과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순전히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 시대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수준이 그랬습니다. 그런 시대상과 반대로 자녀 인격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하는 것은 과히 혁명적인 것이죠.
오늘날도 가정의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은 부모들의 이기주의적인 생각 때문에 일어나곤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생명의 원리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어요. 기독교 가정 안에서도 그 결과 심각한 자녀 문제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공급선이 되어야 할 부모의 위선 앞에서 자녀들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겉은 기독교 가정이지만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모가 영적이고 성령 충만해 있다면 결코 한 인격을 손상하거나 불공평한 압박을 자녀에게 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대치되는 상태로 서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고집불통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소하게 여겨도 좋을 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훈육이란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만일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혀 그 일을 하려 덤비지 마십시오.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서야 하는 것이죠. 사랑을 벗어나는 순간 아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부모는 자기 주장이 아닌 말씀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둘째로 바울은 부모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면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육하라”는 말은 “성숙하기까지 먹이고 기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먹이고 기르는 중요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양분은 주의 교훈과 훈계입니다. 신앙적인 양육입니다. 사람은 조금만 용기를 주면 되는 그러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꼬이고 부패해 있고 비열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전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한 영혼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 기본에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놓일 때 지혜와 지식이 선용 되는 것입니다.
훈육의 목적은 부모의 표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이런 고집이 자녀들을 노하게 합니다. 자녀의 유익이 부모의 지배적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감당할 때 믿지 않는 모든 부모와 전적으로 다른 것은 이 점에서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단지 똑똑하고 도덕적이고 착한 아이들로서가 아니라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고, 사회 속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에 대한 그림자라는 것을 압니다. 부모들과 자녀들이 모두 이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가족관계와 가정이 파탄을 겪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행복이 되는 것이지요. 세익스피어는 말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가진 부모의 고통은 살무사에게 물린 아픔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 부모님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도 자녀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를 통해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온전하게 있을 때 자녀에게로 복음이신 예수님의 생명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샬롬의 관계 안에 서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섭니까? 성령 충만하십시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가정의 연합을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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