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힘: 히 11장 1-6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믿음입니다. 믿음,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이 무엇인가 규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온 사람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현실은 구원의 약속과는 멀어 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 같은데, 실은 여전히 삶이 어렵고 힘이 들어요.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된 걸까요? 이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고민만은 아닙니다. 1세기의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고민하던 문제입니다. 구원받으면 뭔가 나아질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좌절하고 흔들리는 이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과 같은 고뇌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 난관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 자들을 통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시대를 산 여러 사람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지나가는 순간을 위해 살지 않았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는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측면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거죠.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장’인 11장의 첫 구절에서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존재하고 역사하는 정황을 설명한 겁니다. 비록 바라는 것이 아직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실제적이고 확고한 것으로 굳게 붙잡도록 만드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들의 삶에서 실현되지 않았고, 어떨 때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라고 했어요. 그러면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그저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하면 반드시 얻게 된다는 의미일까요? 믿음은 뭔가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과에 대한 신뢰가 아닙니다. 우리 삶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자녀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시고 그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거라는 확신인 거죠. 그러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가시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건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사람들은 지금 보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믿음은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믿음이란 소망을 지탱해 주는 토대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소망하는 바가 허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보증해 주는 실체가 되는 거죠. 그러니 믿음이 있는 자는 다르게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믿음의 관점으로 보니까요. 이 믿음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성취와 완성의 순간을 바라볼 수 있고, 마치 그것의 실상을 얻은 것처럼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11장 인물들의 삶이었습니다.
세속적 관점에서는 지금 없어 보이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확신하고 가던 믿음의 조상들을 아마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세상은 ‘아직’이 아닌 ‘지금’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이들을 대단하다고 인정했겠습니까? 반면에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히 11:2 “참으로 조상들은 이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느 보증서가 더 가치가 있을까요?
11장의 인물들은 세상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믿음이 인정받을 수 있을 건가에 더 큰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이들을 소개하는 구절을 보면 첫머리에 “믿음으로”라는 수식이 붙습니다. 믿음은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세상의 인정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거예요. 마찬가지로 세상도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해석의 틀로선 이들을 결코 수용할 수 없어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른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믿음으로 보는 세상은 그 출발점이 다른 거예요.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세상의 존재가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는 에너지와 물질의 혼합이고, 우주의 탄생은 빅뱅이라는 우연에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신적 개입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도 구속사의 섭리가 아니라 우연히 태어난 산물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우주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하나님의 통치로 움직이는 피조 세계입니다.
친히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에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경험한다면 그래서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의 존재 가운데 계시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그 삶이 낱낱이 드러나 평가하실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심판에 기준을 맞추는 소극적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적극적 신앙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은 그분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 인식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다른 삶, 다른 생각, 다른 언어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거죠.
믿음은 세상을 기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서 하나님은 어떤 것을 보시는 걸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행한 이들을 하나하나 들면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세상은 이들에게 적당히 살라고,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경계선을 허물고자 하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종종 이 계략에 속아 적당히 타협하고 사람들은 믿음의 선을 허물어 버립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타협하여 뒤로 물러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히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행하라고 요청하신다면 할 수 없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또한 이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과정에서 참으로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둘의 제사에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아벨의 예물만을 인정하신 겁니다. 가인의 제사는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이해할 수 있어요. 유대인들은 아벨과 가인 이야기를 들을 때 왜 그랬는지를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제사에서의 제물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아야 했어요. 아벨은 하나님의 기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가인도 자기만의 진지함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법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인의 문제였습니다.
나의 진지함, 나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공적, 우리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합니다. 즉 피의 증거에 대한 믿음, 죄 사함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죄를 정결하게 하는 속죄의 피가 없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예전 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드리는 예배라고 해도 결코 하나님은 그 예배를 흠향하지 않습니다. 그건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믿음의 요소는 동행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였습니다. 믿음의 삶은 자신이 혼자 열심히 달려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단순히 길을 같이 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동행이었습니다. 그 길을 내가 주도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도해 가시도록 순종하며 의지하며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막아내지 못하면 결국 그 끝은 파국으로 끝납니다.
나머지 뒤에 이어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 외에 수많은 이름 없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오직 믿음으로 살았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셨고 그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우리에게 첫 번째 질문으로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인지 깨닫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은 정말 사람들이 자기를 찾기 바라고,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 아낌없이 보상하실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살 수도 없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기억으로 가득할 때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 믿음으로 무장한 자들을 세상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시선이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소망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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