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7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그가 살아나셨고: 마가복음 16장 1-1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고,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1세기 제자들로부터 21세기 현대인까지 모두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인간의 이해력과 상상력을 한계 너머로 몰아세우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부활이 역사 속에서 일어났지만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어서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이성과 상식의 근거만으로 접근해 들어가다가는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택하는 최선의 길은 피해 가는 거예요. 이로 인해 기독교 아닌 기독교로 전락해버리는 겁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부활을 통해 이미 역사에 드러났고 궁극적으로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도’ 속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핵심이 빠지면 어떻게 참된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어요.
부활을 믿고 부활 신앙을 소유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3년 내내 함께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왕좌왕했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 당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환호와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을 수 없었던 거죠. 누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조차도 착각이나 환각이라고 생각했었던 겁니다.
가장 먼저 무덤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 아침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것은 단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간 것이지, 다른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인들은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도 옆으로 굴려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대신 천사가 무덤에 있는 것을 발견하자 혼비백산할 수밖에요. 그렇게 두려워 떠는 여인들에게 매우 놀라운 말이 전해졌습니다. 막 16:6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여인들은 죽은 예수를 찾고 있는 것이지 산 예수를 찾고 있지 않았던 거예요. 여기서 초점을 바꾸지 않는 한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지극히 정상적이라면 그 즉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리를 뛰쳐나와 도망쳤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막 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부활을 믿고 기대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 해 보면 여인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한 것은 이해가 가는 행동입니다. 초월적인 이 사건을 어떻게 여인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론가 없어져 망연자실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마리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친밀한 목소리를 듣고 마리아는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부활의 소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와 당장 알렸습니다.
마리아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산 예수가 아닌 죽은 예수로 가득 차 있어서입니다. 한참을 대화하며 걷다가 여관에 들어가 예수님께서 떡을 나누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 또한 가던 길에서 돌이켜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막달아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나시는 장면을 보면서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된 제자들을 찾아가 인격적으로 만나시고 대화를 나누시고 그들을 증인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원리는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고 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점에서 우리 믿음은 온전하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은 보편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증명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또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장 제자들에게서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당연히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마침내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그곳으로 오신 겁니다. 음식을 먹다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화들짝 놀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샬롬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어 그들에게 손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자신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그들의 선생님이심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믿은 제자들을 예수님은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막 16: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이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예전에 부활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실로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악하고 믿음이 없었던 겁니다. 불신은 마음의 완악함으로부터 옵니다.
마음의 완악함은 믿음의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진리를 들려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기본적인 불신으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부활을 믿지 못했는데, 지금 그 사건과 수 천 년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또 어떤 세상입니까?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세상입니다. 신화처럼 여겨지는 부활을 향한 불신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우리의 믿음이 뭘 봐야 믿는 것, 그것은 참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예수님은 그와 같은 믿음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보았다고 해서 다 믿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 부활 당시에도 대제사장에게 매수되어 헛소문을 퍼뜨린 경비병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 가장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았으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대제사장이 건넨 돈을 선택했고, 그로 말미암아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고, 느껴도 세상에 더 좋은 가치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설령 만나더라도 그편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가치를 우선시하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선물을 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불가해한 일에 마음을 열었을까요?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그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빈 무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음모론만 퍼지게 했을 뿐입니다. 결정적인 부활의 증거는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이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한때는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회상합니다.
3-11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오늘날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책을 통해 수많은 위인을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단순히 지식을 알고 인지하는 것과는 격이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영생의 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이천 년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물론 아직도 대다수 사람이 부활을 믿지 않고, 그건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망상과 착각, 변화된 심리상태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집단 최면에 의한 망각도 환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만남의 감동이 전달되고 성령님께서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깨닫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심으로 오늘까지 부활의 감동과 역사가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집단 맹신으로 이천년을 이어올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숱한 반대에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오늘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부활의 가능성에 귀 기울였고 마음을 열었던 많은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만남으로 그들의 인생이 변화되었고, 죽음을 넘어선 소망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셨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심으로 죄의 권세를 벗어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과 소망 안에 거하지 못하고 그저 이 땅의 가치에 목메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영원토록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와 같은 무지함의 자리에 있다면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덧없는 세상의 소리에 안심하고 그냥 앉아있지 말아야 합니다. 무지함과 불신의 자리에 있으면 끝내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인식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1세기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새 창조의 궁극적인 의미는 죽음으로 한계 지어진 현실 세계를 통치하는 거짓 권세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치명적 두려움에서 우리를 일으키실 힘에 의지해 부활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 부활의 삶을 살아가며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에 증거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가서 아직도 영원한 나라의 소망 없이 이 땅에 보물을 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자들에게 외칩시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소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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