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6장 25-3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우리는 지난 다섯 주간 사순절 절기를 지나왔습니다. 십자가 고난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여정은 우리를 위한 발걸음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천국에 간다는 확신도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원의 믿음에서 멈추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삶 전역으로 확장하여 적용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이유는 믿음을 단지 구원의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확장되어 가는 믿음의 적용이 약한 겁니다. 실은 없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어려움 또는 고난, 위협 앞에 서면 머리가 다 하얘지는 겁니다. 지금 내 뒤에 든든하게 서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여서입니다. 그러니 대처하지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 간에 차이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우리의 삶을 견인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요일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와 같은 믿음은 생활 전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는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몸과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방어벽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쌓아가지 못하니까 나타나는 증상은 불안과 염려, 근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떤 의미로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다른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 17:20에서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시면서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있어도 라고 하셨요. 겨자씨의 크기가 참으로 작습니다. 그런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명하여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작은 믿음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저는 이것이 범주와 질량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영생을 얻었으면 구원의 믿음을 넘어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의 믿음이 적용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믿음의 범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그 확장은 구원의 약속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이루어가고 계신 구원의 놀라운 경륜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 상황은 어떤 어마어마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질량이 크냐 작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질량의 믿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일지라도 우리 안에 믿음이 분명 있다면 구원의 문제를 넘어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매 순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헌신이 가능한 것입니다.
삶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으로 세워져 갈 때 우리 삶은 단단해 져가리라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억압과 수고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 슬픔, 염려, 근심을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즐거운 교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가 용서를, 상처를 가지고 나아가 치유를,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부요를, 죄책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유함을, 염려를 가지고 나아가 평강을, 열등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존감을, 영벌을 가지고 나아가 영생을 얻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의 즐거운 교환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은 죄를 대속하고자 하시는 것은 물론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참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이 이루어놓으신 것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에서 무슨 염려와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땅에 허무한 보물을 쌓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염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진정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단순히 몸을 위한 것 때문에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는 이들과는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들은 실은 우리들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세상 염려의 3종 세트입니다. 방송매체의 광고를 보세요. 대부분 이 3종 세트를 위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상의 일들에 대한 염려를 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대충 먹고, 마시고, 입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가만히 앉아 양식이 아침마다 기적적으로 도착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일들에 대하여 염려하고 노심초사하며, 또 이런 것들에 너무 생각이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배당하지 말라는 거죠. 예수님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매일 신뢰하는 도전 속에서 살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문제에 휘둘려 염려할 때, 우리는 그 염려에 얽매이고 불신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께서 가장 기본적인 필요들을 공급하시는 분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 우리는 삶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 섬김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확인하여주시고자 예수님은 먼저 두 가지 증거 중에서 하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새들은 그날의 모이를 구하기 위해 부단히 날아다닙니다. 이렇게 새들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해야 할 활동은 다 했는데도 예수님은 새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먹이시며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는 단지 먹이를 찾기 위해 날아다니다가 그것을 발견해서 먹는 것뿐이지 먹을 것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들을 위해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듯 공중에 나는 작은 새조차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자녀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하게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뢰를 기초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는 오늘을 위한 이런 우리의 노력을 방해합니다. 사탄에게는 사람들이 땅에 보물을 쌓든 세상일에 근심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에 있게 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데 그래서 궁극에는 자기 소유로 삼으려는 데 목적이 있어요.
그렇게 우리를 영적으로 움츠러들게 하고, 믿음을 무디어지게 하는 염려를 더는 하지 말고, 생활의 염려보다는 어떻게 이것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 기도하고, 현재 상황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그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대부분의 염려는 염려로 그치고 맙니다. 해결점도 찾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도전들, 관심사들, 문제들 그리고 선택들에 직면합니다. 그것들에 대해 매번 염려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염려가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이루어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의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염려하는 이들을 보면 기본적인 것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계속 악순환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으로 눈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제자들에게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성장의 과정에서 꽃이 관여한 것이 없습니다. 씨로 뿌려져 싹이 나 자라 꽃 핀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백합화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수고와 재능과 노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인류 역사상 인간영화의 극치를 누린 왕인데, 그런 솔로몬의 영광조차도 하나님이 길러주시는 백합화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들풀조차도 보호하시며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세상 염려 3종 세트로 압살당하고 있다면 이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지시지 않겠느냐는 반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씀하시면서 단호하게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정녕 믿음이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는 자라면, 든든한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신뢰하는 자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로 인해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일에 마음이 사로잡혀 마음이 나누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니까 자꾸 이 땅에 보물을 쌓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염려와 불안을 어떻게든 잠재울 요량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고민하며 염려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염려는 예수님 제자들의 삶 속에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32절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갈망은 세상 사람들에겐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들, 내세적인 것보다는 현세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신다는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과 똑같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우리의 길을 성실하게 달려가야 합니다. 염려함으로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믿음이 작은 자가 아닌 큰 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붙잡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편협한 믿음이고 왜곡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다른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목적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의 모든 여정을 뒷받침하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염려하고 있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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