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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마 5장 43-48절

by 최수근 2022. 2. 13.

2022년 2월 13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마 5장 43-4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하는 우리의 진짜 싸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외부 환경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고, 옛 자아와의 내적인 싸움입니다. 사탄이든 옛 자아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 과하게 신앙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타협하고 많은 사람이 세상과 적당하게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많은 영역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5장 후반부에서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고 적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부담감을 덜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교활한 인간들, 죄로 물든 이들의 공통적인 행동입니다. 있는 그대로 믿고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그간에 왜곡된 말씀들을 올바르게 되돌려놓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좇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순종하면 참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마음속엔 엄격하게 신앙 생활하기보다는 좀 쉽게 가고 싶은 유혹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타협하면서 가다 보니 정체성이 흐릿한 성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들은 옛날과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엄청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세상의 세속적 흐름에 맞게 적당하게 적용하면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지적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갖고 있지만, 율법을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남용했던 거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의 두 기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면서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의 범위는 유대인을 넘어 멀리 이방인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그들의 이웃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를 축소해 같은 국적과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던 겁니다. 그들의 이웃은 오직 유대인들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혐오했습니다. 개 취급을 했습니다. 한때는 같은 이스라엘 족속에 속했던 북쪽의 지파들이 멸망 이후 이방 나라들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 후예인 사마리아인들까지도 심히 멸시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을 이방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원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뜩이나 이방인들을 싫어하고 혐오하던 이들에게 서기관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에다가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회피조항을 첨가하였습니다. 원수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원수들의 압제 아래 참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원수들을 어찌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 원수를 미워하고 싸워야만 했던 거죠.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수많은 열혈당원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의 여파는 백성들의 일상에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던 겁니다.

하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은 구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랍비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한 미움에 대한 구약 본문 중 일부를 작위적으로 해석한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정신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겁니다. 이웃의 범주에서 원수를 명확하게 배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원수를 미워하라라고 추가한 부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길이라고 반박하시면서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주장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 이웃은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과 원수에게 서로 다르게 적용하는 이중적 도덕적 기준을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의 흐름을 보면 세상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로 인해 어떻게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지 분명해집니다.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적용이 우리에게 좋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이들을 품고 가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를 해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생각만 해도 부아가 치미는데 어찌 용서할 수 있고, 어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운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지옥이 아닌 천국을 살려고 하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주어야 하는 지점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 타인, 그중에서도 나를 힘들게 하고, 툭 하면 공격하는 적, 원수를 향한 분노, 그리고 미움을 버리고 저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버림받고 사악하고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연민을 우리 마음에 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생각이 아닙니다. 바로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품고 있어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간의 이기적인 죄를 벗어나 말씀의 본래 의도대로 행하며 살아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자신을 해하려고 하고, 힘들게 하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어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본래 명하신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실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친구가 되었건 적이 되었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큰 의로 뽑으시는 마지막 예는 우리에게 가장 도전적입니다. 도저히 행할 수 없을 것 같은 차별 없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사랑할만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때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고, 또 로마서 510절에서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자격을 전혀 전제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이해하기에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란 섬김, 곧 실제적이고 겸손하고 희생적인 섬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들은 좋아하고 교제하지만, 마음을 상하게 한 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미운 마음이 앞서 버리는데 어찌 사랑할 수 있고, 어찌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배타적인 이기심입니다. 우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 결과로 배타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보는 것이 옹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똑같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게 되고, 결국 반복적으로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책임을 절제의 절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원수로 인해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고 또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향한 중보기도는 기독교적 사랑의 절정입니다. 본회퍼는 이것이 최고의 명령이다. 기도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원수들에게 가고, 그의 편이 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점에서 기도는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속에 원수에 대한 사랑을 약간이라도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기도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기 전에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 기분, 생각을 기준 삼으면 어떻게 우리가 미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하는 원수 같은 자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어요? 점점 미움, 증오가 깊어질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어떠한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내어주심으로 불의한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고, 우리를 양자 삼아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 어떤 차별도 행하지 않으시고 악인이든 선인이든 골고루 은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직 원수 되어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은 의인과 악인에게 평등하게 나타나는 무차별적 사랑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이후 우리가 이 은혜로 충만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아들 됨의 특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와 같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행함으로써 확증됩니다. 예수님은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차별 없는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분명 구별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처럼 제한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물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 유대인끼리만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정작 필요로 하는 이방인을 돌아보지 않고 멸시했습니다. 심지어 위기 가운데 도움을 요청하는 동족들을 향해서도 그들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외면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세우셨지만, 그들은 그들의 이웃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선민주의에 빠져버렸던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룩함이 분리와 배척을 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거룩함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과 자비의 실천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들 마음에 드는 자들끼리만 모여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힌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안이든 밖에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어야만 합니다. 그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이 머리이신 교회라면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몸 전체로 흘려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커뮤니티일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높은 벽을 깨고 참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훨씬 높은 기준들, 세상이나 심지어 그들의 종교가 인정하는 것보다도 높은 기준을 요청하셨습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수준이 제자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5:46-47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선행을 능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이웃사랑의 공동체에 다른 이들을 포용함으로써 배타적인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그저 어떤 행동이 올바른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죽으신 예수님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고 나아가서 그 사랑을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 세상에 우리가 직접 그 사랑을 나타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아가페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발견된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강력한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미 레위기를 통해서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리스도인의 기준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우리 기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을 인간에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의를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들보다 조금 나은 것 같다고 해서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오늘 원수를 향한 사랑이라는 기준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기준점입니다. 그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시켜주는 힘이 바로 아가페 사랑에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 가운데 온전한 제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8절에서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원수들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향해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랑하심에서 항상 온전하게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 생각, 의지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설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이 목표를 이루게 하시는 위대한 동력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함으로 이루어가도록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여기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매번 힘들게 하는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단순히 용서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진정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소망이 있습니까? 진정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저들의 영적인 유익을 구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서 온전하게 살아가라 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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