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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우리는 무엇에 취해 살고 있는가? 행 2장 4-13절

by 최수근 2021. 5. 31.

2021년 5월 30일

[우리는 무엇에 취해 살고 있는가? 행 2장 4-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성령의 은사는 다양합니다. 어느 하나만 참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60억 인구 한 사람 한 사람이 독특한 것처럼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합당한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은사보다도 방언에 관심이 많습니다. 방언이 처음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나타났고, 확실히 다른 것과는 차별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누군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다른 많은 은사가 그에게 있음에도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대부분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방언, 즉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순절에 처음으로 제자들이 방언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통역이 필요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집단으로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한 말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선포되는 공적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은 사람을 향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말입니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런 특성으로 볼 때 처음 방언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 목적하신 것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가 말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이해로 사도행전 2장의 본문을 접근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람 소리가 일고, 불의 혀처럼 갈라져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무는 등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면서, 가장 먼저 120명의 제자의 입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 충만 하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언어는 의미 없는 주절거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오는 각종 외국어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향한 언어이니 누군가 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를 위해 조연들을 준비하셨습니다. 5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유대 남자들은 세계 그 어디에 살든지 일 년에 세 번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23: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대개는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50일 후에 준수되는 오순절을 함께 지키곤 하였습니다.

이 순례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자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순례자들은 이 특별한 상황으로 놀라워했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는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소리는 공용어인 헬라어도, 그렇다고 유대의 일상 언어인 아람어도 아니었습니다. 120명의 거룩한 주의 백성들은 세계 각국의 고유한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루살렘의 방문자들은 제자들이 이렇게 아람어가 아닌,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웠던 거죠. 이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각종 외국어를 구사할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대부분 제자들은 변방 갈릴리 토박이들이었거든요. 외국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이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면 지금도 사람들이 놀랄 겁니다.

그런 연유로 무리들은 신기했던 거죠. 27-8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그 당시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예수의 추종자들이 지금 수일째 모여 뭔가 작당을 벌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추종자들이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는 말은 어떻게 이런 변방 출신들이 외국어를 말할 수 있지 라는 의미인거에요. 그 당시 갈릴리는 교육환경이 열악한 지역이어서 외국어를 배울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거죠. 이 놀라운 일에 직면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이게 뭐지의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9절부터 11절까지는 제자들이 말한 언어의 나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많은 나라가 언급되었습니다. 이건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왔음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성령의 오심으로부터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이 흘러갈 것을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이제 이들 열방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각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열방으로 복음이 전파될 세계선교의 시대를 예고하는 예언적인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성육신적 선교의 방향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무작정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듯이 제자들은 각 나라 언어들을 배우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지역적,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넘어 선교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육신적 선교의 방향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는 11절 말씀 하반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11절에 제자들의 방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여러 다른 언어들로 하나님 나라의 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각 나라 언어로 하나님은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경건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듣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른 일이 아닌 언어의 틀을 깨는 방언의 역사를 성령강림을 통해 제일 처음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도록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비의 세계로, 영적인 세계로 깊이 몰입하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강화시켜주시고, 그래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삶을 사는 겁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복음에 몰입하거나 미칠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 없이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도록 오순절 성령강림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을 증인공동체로 세우시고 동시에 세계 만민을 향한 구원역사의 출발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세계만국의 언어들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증거하는 것을 보면서 무리들은 당황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이것은 복음 앞에 선 죄인 된 인간들의 반응입니다. 여기에 마음의 벽에 금이 간 자들은 결국 복음 앞에 서게 되죠. 그러나 여전히 완악한 자들은 조롱할 것입니다.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입니다.

212절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무리들의 말이 맞습니다.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면 다른 것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새로운 술에 취했다고 평가 절하했지만 120명의 제자는 성령에 취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술에 취하면 인생을 망치는 길이 되지만 우리가 성령충만 하면 우리의 삶은 성령에 이끌리어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이 새사람으로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새로운 역사는 성령의 충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옛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고, 주와 동행하도록 도와주시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 점에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은 주변의 수많은 옛사람이 보기에는 자기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기에 새로운 무언가에 취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식을 깨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제정신의 본질이 뭐겠습니까? 이기심, 탐욕, 교만, 음란, 자기경멸, 열등감, 과도한 경쟁심, 시기심, 질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한다고 하면서도 성령 충만하지 않고 죄된 인간으로서 제정신이 돌아오면 지금 신앙생활의 모든 것에 갈등하게 되는 거예요. 신앙의 모든 것이 불편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편한 길을 택하게 되죠.

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이것저것 재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존재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그 분의 능력과 에너지를 성령을 통해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계를 갖고 있는 내능력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서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다보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옛사람의 틀을 깨는 일이 어렵지만, 성령 안에 있으면 옛사람의 프레임을 과감히 부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새로운 체질로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깨우쳤습니다. 땅의 능력이 아닌 하늘의 능력을 힘입었습니다. 그 결과 선교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성령에 취하면서 사도행전 18절의 말씀이 이 땅에서 강력하게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적 선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지금 무엇에 취해 살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 충만하십니까? 여전히 세상일들이 우리를 장악하고 그 일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세상에 취한 삶을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넘치도록 성령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섭시다.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탈바꿈하는 거룩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성령님이 새롭게 하시는 변화와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힘입어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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