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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마 6장 1-6절, 16-18절

by 최수근 2022. 2. 20.

2022년 2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동영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마 6장 1-6절, 16-1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다 보면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고의 빌런이자 인기 캐릭터인 로키가 체포되었다가 테서렉트의 힘을 빌려 도망을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마블은 로키라는 드라마를 제작해 방영했습니다. 로키는 어느 황량한 사막으로 이동을 하지만, 곧바로 시간 변동 관리국 TVA 소속 요원에 의해 체포됩니다. 그 과정에서 모비우스라는 시간관리국 수사관을 만나고 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상을 통해 하나하나 보게 됩니다. 가증스러운 자기 자신에 직면해서 로키는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과거 영상 속 자신을 보면서 계속 무너져 갔습니다. 남들을 속였던 수많은 장면, 어머니의 죽음, 미래에 타노스에게 자신이 죽는 모습까지 보게 되죠. 그 앞에서 힘들어하는 로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고, 기록되어 낱낱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거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그러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함에 대해 이실직고해야만 합니다.

14:11-12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 보고 계시는 겁니다. 시편 139편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전인격과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감찰하시고 아시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도 없고, 속내를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목적과 동기를 감추고자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경건함을 뽐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볼 때 사람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이들의 경건함의 무게를 보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이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열정보다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종교적인 의를 과시하여 칭송을 받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심각한 문제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결코 사람을 의식해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사람들 보는 앞에서 기도나 금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사람들 앞에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영광을 받고자 한다면 그들의 행함은 하나님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렇게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의에 대해 하나님은 그 어떤 응답도 보상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당장 보이는 명예와 명성에 마음을 쏟습니다.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이 가득 차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진정성도 자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종교적인 모든 행위는 극장의 쇼나 연극처럼 연출된 행동입니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하나님 주시는 예기치 못한 기쁨과 성령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시고, 이들의 자기 과시적인 의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그 당시 유대교의 공적인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세 가지 영역인 구제, 기도, 금식을 통해 앞으로 제자들이 행하여야 할 경건의 방법을 새롭게 제시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 우리 이웃,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지적하신 영역은 구제입니다. 구제는 이웃과 나누는 섬김의 삶이고, 그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소외된 자들에게 마음을 두고 계셨고, 그들을 돕도록 명령하셨습니다. 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약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에는 항상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유혹의 싹을 잘라내라고 하셨습니다.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탐욕스러운 갈망은 바리새인들을 따라다니는 죄였습니다. 인간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는 너무나 탐욕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의 구제를 완전히 망쳐 버렸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우리의 구제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 같은 과시적 태도로 구제하는 것을 금하시고, 이제 기독교적 방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은밀하게 주는 것입니다. 3-4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 된 허영심을 억제하고, 죽이기 위해 우리의 구제를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흡족해하기 위해, 또는 우리의 구제가 얼마나 관대하고 훈련되어 있고 성실한 것이었는지 우쭐대기 위해 계속 자신이 행한 일들을 되새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궁핍한 사람을 구제할 때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칭찬도, 자기 자신을 칭찬할 만한 근거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기에 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행동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값없이 주신 그 은혜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구제가 자축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겸손에 기초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은 계산하지 않는 관대한 삶이어야 하고, 지극히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무심해야 가능할 일입니다. 이렇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와 함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작은 보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십시오.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두 번째 예로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경건한 유대인들은 보통 서서 기도했습니다. 또 회당에서뿐 아니라 길거리 어귀에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눈에 비추어진 그들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 경건의 모습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회당이나 거리에 서 있을 때, 그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밝히셨습니다. 이들의 경건 배후에는 교만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도도,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공적 기도가 그들에게 주는 자기 자랑의 기회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사람들의 칭찬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전부 다 받았느니라.” 그러니 정작 하나님으로부터는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할 수 없어도 그 일은 특화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고 경건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이목과 그들의 칭찬을 받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건 경건도 거룩함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이죠. 그 거짓됨이 낱낱이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자기만족, 자기 위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렵지 아니하기에 그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거짓과 가식, 위선, 자기만족의 유혹을 물리치도록 제자들에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방해하고, 우리 기도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차단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나만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겸손함으로 경배할 수 있고, 사랑과 신뢰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더욱 큰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리시라.” 어떻게 갚아주십니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하나님께서 은밀히 기도하는 우리에게 적극적인 갚아주심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은밀한기도를 강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기도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공적인 기도이든 사적인 기도이든 간에, 모든 기도의 중심인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친밀함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동기가 개입되어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함으로 설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진실함이 없다면 우리 기도는 일방적인 외침에 불과한 소리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에 울림을 일으킬 수 있는 기도로 말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금식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자기 부인, 자기 절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참회의 방편으로 금식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금식조차도 자기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해 방편으로 삼았던 겁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동안 그들의 모습이 힘들어 보이도록 하고, 회개의 표시로서 머리와 얼굴에 재를 뿌림으로써 꼴이 말이 아니게 하였습니다. “나 지금 금식하고 있어!” 온 동네에 알렸습니다. 이것은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픈 교만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짓된 위선을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할 때 금식하고 있는 티를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왜 그래야 합니까? 금식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자기 부인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의 종교적 훈련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삶이 변화되지 않는 데에서 드러나는 금욕적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은 참 제자로서의 경건은 사람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보여야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바리새인들의 경건은 과시하는 경건으로 허영심이 동기이고 사람들에게 상을 받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은밀한 것으로 겸손이 동기이고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금식하는 것 등 모두 그 자체로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구제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금식함으로 자신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선의 결과는 이것들을 각각 자기 과시로 바꾸어 버려 우리의 진정성을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경건의 삶을 살면서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의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위선을 걷어버리고, 진실함을 보여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서 있음을 인식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임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를 세밀하게 의식할 때만 우리 경건의 삶은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 우리의 동기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한 생활이 우리 자신의 위로도, 사람들의 시선도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리 잡도록 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의 동기, 신앙의 동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이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보상을 주된 동기로 여기는 것은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비판하셨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가치 있는 동기는 위로는 하나님께 감사와 순종과 영광을 드리기 위한 노력으로 향해 있고, 옆으로는 이웃을 위해서 향해 있을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 속에서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이 일이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 설 때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 순간 거짓됨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음으로 서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경건의 실제적인 실천을 은밀히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늘도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은 고단하고 힘든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동행의 길이며, 이 길 끝에서 하늘 아버지의 상이 클 것입니다.

물론 가는 내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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