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장 13-1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AI를 이용한 취향 저격으로 소비자들을 끌어내는 마케팅이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의류, 여행, 음식, 영화, 노래, 뉴스, 영상 등을 추천하니까 소비자의 측면에서는 고민하지 않고 선택하게 되는 겁니다. 참 친절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친절함 뒤에는 경제적인 수탈도 이어지겠지요. 이런 일이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기회가 박탈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취향 자체가 어느 지점부터는 AI가 형성해주는 데로 따라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튜브를 검색하다 보면 AI에 의해서 거의 비슷한 주제들만 창에 뜨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취향 저격에 의한 다양한 선택지를 보여주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선택해서 보는 것 같지만, AI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몰아가는 정보에 장시간 그렇게 노출이 되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중의 취향과 그 사회 전반에 흐르는 것들이 늘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옳지 않은 것들이 드러날 때도 있지만 사람들은 슬쩍 눈감아 버리거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런 상황에 수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간혹 화들짝 놀랬어도 긁어 부스럼 만들 일이 없다는 논리로 세상은 그냥 그렇게 굴러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에 점점 동화되어버립니다. 세상과 같이 가지 않으면 소외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입니다. 이건 불합리한 집단 논리이고 진영논리예요. 그러나 대항하지 않습니다. 대항해도 끝까지 싸우지 않습니다. 며칠 전 텍사주의 초등학교에서 21명이 총기 난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이 들썩이고 있어요. 그런데도 지금껏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일들이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큰 흐름을 좋아하죠. 굳이 어렵고 힘든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세를 거스르려고 하지 않아요. 도전하기보다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남들만큼만 적당히 하자는 보신주의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롯된 뉴노멀 시대에 교회마다 모이는 일도 쉽지 않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로 주일에 한 시간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종종 참여함으로써 마치 신앙생활을 다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선 온라인의 편리함을 맛본 이들이 대면 예배로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두 가지를 같이해야 하고, 이걸 더 심화시켜보려고 몇몇 교회들은 메타버스 시대에 그 플랫폼 안에서 다양한 목회적인 프로그램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MZ세대를 주목하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안락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편리함을 따라간다면 복음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방법에 메어 달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정권이 교체되면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가 혁신입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혁신이 필요합니다. 그건 적극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없이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외치신 겁니다. “회개해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키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질서로서 이 땅의 왕국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다고 하니 제자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더더욱 그 길이 쉽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네 가지의 대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 소수와 다수, 생명과 멸망이라는 두 영역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출발을 명령하셨습니다. 넓은 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예수님이 보실 때 많은 이들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평가하신 거죠.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그들이 선택하도록 결정권을 넘겨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저들을 향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구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편안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AI의 다양한 취향 저격에 따른 추천을 받아 우리가 이것저것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 하나의 문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좁은 문을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걸까요? 일반적으로 좁은 문은 불편하고 위험합니다. 보통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탈출하기 위해서는 넓은 길을 확보 해야 하고, 문이 넓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 화재가 일어났을 때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희생되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습니다. 오히려 좁은 문, 좁은 길은 죽음에 이르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물리적으로 단순히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 좁은 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자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단지 좁은 길이 아니라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단 하나의 문이라는 점에서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 점을 물고 늘어집니다.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라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길에서 영적으로 갈라서야 함을 반드시 요청받는 길이어서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가다 보면 언젠가는 쉬워지겠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좁은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늘 단독자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 자신과의 믿음의 싸움입니다. 실은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길은 처음부터 좁은 문으로 출발해서 끝까지 좁은 길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좁은 문, 좁은 길이었다가 어느 순간 넓은 길이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에라스무스는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리까지 가는 데는 칼로 도려내는 슬픔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과 가슴이 찢어지는 사건들과 많은 깨달음을 지나야 했다”라고 고백을 했던 겁니다. 사방에 우리를 오해하고, 줄곧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좁은 문으로, 좁은 길로 가려고 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비록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그 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그 길에 서기를 주저합니다.
반면에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늘 사람들로 붐빕니다. 넓은 문과 길은 종교지도자들의 문화적이고 위선적인 규범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여지를 제공하면서 그들을 초대합니다. 사람들은 이 널찍한 길에서 편하고 방해받지 않게 들어가서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억제하거나 제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용과 허용성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는 여행자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자신의 성향을 따르면 되는 거예요. 저항하거나 노력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세에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일러주는 데로 믿고 가면 되는 거죠. 그러나 그 안락은 속임수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문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왜 예수님은 넓은 문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 한다면 그 사람은 곧 매우 수월한 넓은 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은 수없이 그 길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그럴싸한 길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런 문들이 표면적으로 볼 때 더 호소력이 있는 초대를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그 문을 열고 그 길을 여전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끝은 멸망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아닌 굳이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 문과 그 길 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찾고 찾을 때만 보이는 겁니다. 그런 수고가 싫은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가는 길은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세상 사람들의 뒤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유일한 문으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쉽게 가려고 하는 길이 아니라 찾는 자가 적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좁은 길에 서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협착한 길로 이끄는 문은 좁다고 하셨습니다. 그 문을 발견하려면 잘 찾아보아야 합니다. 놓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왔는지, 지금 좁은 길로 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면 그래서 삶에서 열매로 드러나고 있으면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내가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고, 겸손하게 기도함으로 가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좁은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매사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성령의 말씀 하심에 귀 기울이고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생명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에 누가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눅 13:23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할 곳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 집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개인적인 결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그 문을 열어젖히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머물러 있어, 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에만 머물러 있다면 좁은 문이신 예수님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좁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분과 연합하여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나의 통제권을 주님께 넘겨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넘어 삶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지 못하면, 나를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변화되지 않은 본성으로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은 살 수 있겠지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써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안타깝게도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미 넓은 길 위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로 들어가면 우리의 삶이 구원에 이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로써 이 땅을 살아가는 참 제자가 될 것입니다.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좁은 길이든가 넓은 길이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 길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대인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도, 중용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선택에서 우리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거나 밖에 머물러 있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좁은 문을 출발하지만 천국의 삶으로 열려 있는 길에 들어서는 것에 관한 문제 혹은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죽음의 정류소로 좁아지는 자기 중심성이라는 넓은 길에 머물러 있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실로 무시무시한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끝에서 단순히 그 가르침에 감탄하고 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갔습니까? 그 좁은 길에 있습니까?
물론 좁은 길을 걸어야 하는 제자들로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의미하는 대가들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부르너는 “예수의 윤리가 어렵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바보로 만들지 말라. 예수의 산상수훈은 피나는 노력과 도덕적 투자를 요구한다. 그것은 거친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거친 길이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독자적인 수고로는 100% 실패할 뿐입니다.
그리 갈 때 이 길의 끝은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우리의 인생이 채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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