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5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주께서 행하신 아름다움 일을 알리라: 사 12장 4-5절, 욘 4장 1-1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탈레반의 횡포를 피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 한국도 작전명 “미라클”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 재건과정에서 한국과 협력했던 현지 직원과 가족 390명을 기적적으로 구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분쟁지역에서 한국이 구해낸 인원으로서는 지금까지 최대 인원입니다. 그중에 10대 이하의 아이들이 절반이나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라클 작전을 바라보는 외신들도 전격적이고 신속한 구출에 놀라워하였습니다.
이들의 구출을 위해 한국대사관 직원이 탈출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상 연락망을 통해 사람들을 두 곳에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버스 6대에 나눠 타고 공항으로 진입하였어요. 공항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 난관을 뚫고 390명이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현지에서 한국에 협력했던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에 대한 신의가 한국에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많은 나라들이 구출과정이 어렵다 보니까 쉽게 포기했습니다. 자국의 수송기를 여러 대 보냈지만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한 나라도 있었으니까요.
그와 함께 여기에서 비상 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다 보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누군가 생각하고 탈출을 위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것입니다. 자기만 살면 된다는 극히 이기적인 생각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어서입니다. 실은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아프카니스탄의 협력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했다면 아프가니스탄 주재 한국대사관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기적은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믿어요. 저는 한국에 들어온 저들이 이곳에서 잘 정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국교회가 종교적인 가치를 들이밀고 저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 있어요. 요나 선지자라면 저들 이방인들은 구해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 선지자의 모습 속에서 매우 이기적이고 타자를 생명 자체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읽어내었기 때문에 오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고 했지만 요나는 그 일이 죽어도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저런 수준이라는 것이 과히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실은 이런 수준의 목사들 또한 지금도 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이 있었듯이 혹 여러분 가운데도 구원받는 것이 죽어도 싫은 니느웨 사람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미웠으면 저런 생각을 했을까요? 철천지원수인 거죠.
그런 마음으로 도망치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가로막으셨습니다. 풍랑이 이는 선상에서 요나를 다른 이들이 바다에 던져넣게 하시고, 그런 그를 물고기 배 속에 넣었다가 다시 구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 요나가 마지못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전하도록 하나님은 일련의 과정들을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니느웨로 간 요나는 사흘길을 걸어야 니느웨를 다 돌 수 있는데 하룻길 정도 다니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을 전하고 속히 요나는 더 외치지 않고 니느웨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려한 데로 니느웨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까지 회개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진노를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망하기를 바란 요나는 이 상황을 접하자 그 사실이 매우 싫었고,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이겠죠? 왜냐하면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판을 선언했지만 그들이 회개하면 뜻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그들이 구원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구원받는 상황에 이른 겁니다.
그는 편협한 배타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더 삐뚤어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고 말았습니다. 욘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죽여달라고 하는 요나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요? 그는 니느웨가 용서받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화를 내고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지금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죠. 그들이 구원받은 일을 기뻐해야 하는데 오히려 화를 내니 그것은 옳은 행동이 아닌거죠.
이에 요나가 기도를 멈추고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나와서 다시 지켜보게 되죠. 그는 쉽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곳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 밉살스러운 요나를 위해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강렬한 햇빛을 차단하여 그늘이 지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준비해주신 박넝쿨로 인해 요나가 크게 기뻐했습니다. 소소한 자기 일에는 크게 기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상황을 즐기려고 하는 요나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무슨 계획이신지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넝쿨을 다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결국 박넝쿨은 시들어 다 말라버렸습니다. 더는 요나를 위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되었어요.
거기에다가 짓궂게도 하나님께서 해가 뜰 때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 하시고, 해는 그대로 요나의 머리에 작렬하였습니다. 박넝쿨 때문에 시원하게 니느웨를 지켜보다가 갑작스레 뜨거운 햇볕과 바람에 요나가 정신이 나가 하나님께 투정합니다.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툭하면 죽기를 바라는 요나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늘 이런 모습은 아닌지요?
이기적이고 도발적인 요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요나가 하찮은 박 넝쿨이 시들어 죽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게 여김받는 니느웨 성읍이 멸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끝까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그렇게 자기를 위해 햇빛을 가리웠던 박넝쿨이 말라버린 것에 힘들어하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속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박넝쿨은 아꼈지만, 니느웨에 있는 좌우를 분명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의 사람들 그리고 나아가 수많은 가축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편견만을 고집할 뿐 자가당착에 빠져 무엇이 자기에게 잘못된 것인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웬만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코로나19로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사람이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어서입니다. 보이는 이런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 옆에서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말입니다. 이들이 눈에 밟혀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현대판 요나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만 소중하게 여기는 이기적인 이들로 충만한 것은 아닌지? 이것은 내 문제가 더 중요하지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마음을 둘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 요나와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만도 못한 그릇된 일을 저지르며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를 일깨우시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그릇된 것을 고집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높은 벽을 넘어 주변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이들 또한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아낀 박넝쿨과 하나님 자신이 아끼신 니느웨 성읍은 실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 가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시고 저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 계획을 위해 이를 거부하던 요나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우리도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신앙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 기독교 신앙 안에 있다면 이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크리스텐덤의 벽을 말입니다. 우리로부터 생명이 흘러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독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사 12: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그러나 그들은 그 일에 전념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만국 중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선포하도록 하는 일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막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늘 교회의 사명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극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을 온 땅이 알게 하는 것이 부르심 받은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사 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차원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일은 알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들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말로 전하는 것만 아닙니다. 우리 삶이 그 증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진정성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이웃에게 보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하심 앞에 우리는 순종하고 있습니까? 요나처럼 자기중심의 길에 서 있지 않습니까? 한 생명 한 생명을 안타까워 하시고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이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구령의 열정을 갖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일인 복음을 전합시다. 구원의 기쁨을 나눕시다.
로마서 10장 14-15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시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미라클 작전과 같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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