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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주를 볼 수 없다니요? 히 12장 14-17절

by 최수근 2022. 11. 1.

2022년 10월 2일 주일예배

[주를 볼 수 없다니요? 히 12장 14-1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 2월에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7개월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중동과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분쟁이 계속되면서 희생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세상에선 다툼과 싸움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겨야 하고, 자기가 영광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 간 전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치열한 싸움들이 사람들이 사는 곳곳에서 터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세상은 세속화와 유물론의 거센 파도에 너무도 참담한 모습들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가치들이 무너지고, 빈부의 심각한 격차가 벌어지고, 인권이 유린 되고, 각종 뉴스를 접하다 보면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입니다. 이런 세상에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아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삶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세상을 떠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은 세상을 떠나자는 명령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세상으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로서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식별될 수 있는 마크는 무엇일까요?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선 한쪽은 푸른 띠를 다른 한쪽은 흰 띠를 팔과 헬멧에 두르고 전투를 치릅니다. 피아식별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걸까요? 어떤 분은 도덕적 우위라는 말을 꺼내고 싶을 겁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법 없어도 살아갈 만한 정의로운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보다도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따라 할 수도, 소유할 수 없는 그런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히브리서 1214절 말씀에서 두 가지를 따르라 하였습니다. 14a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라고 하였습니다. 따르라고 하는 명령은 뭔가를 단순히 졸졸 쫓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긴박감을 가지고 정말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 열매 이어서입니다.

먼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르라했습니다. 예수님은 마 5:9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218절에서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악을 눈감고 가면 어떻게 진정한 화평함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다시 악이 득세하여 상황이 나빠질 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히틀러에 대항했던 것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악을 향해 침묵하는 것도 악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은 팍스 로마나처럼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짜 평화입니다. 진정한 화평은 예수님도 자기 몸으로 막힌 담을 허무셨듯이 우리의 희생과 섬김, 낮아짐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자기는 손해 안 보고 이겨 먹으려고 하니까 항상 싸우는 것 아닐까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은 언제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이런 마음에 불을 지핌으로 분열을 조장합니다. 이걸 우리는 대적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화평함이 먼저 적용되어야 할 곳은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섬김, 돌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화평함을 따르지 못하면 밖에 나가서 화평함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종종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 치열하게 싸우는 통에 세상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힘으로 이루어지는 팍스 로마나와 같은 거짓된 평화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샬롬이 우리들의 삶에서 흘러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화평함이 이웃을 향한 삶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이라는 예배 공동체를 향해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되도록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구별되도록 부르시는 겁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하면 사람들은 뭔가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배, 기도, 묵상, 헌신, 금식 등 종교적인 행동이 넘쳐나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이 우리 내면과 행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여겨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거예요.

결국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화평함과 거룩함이라는 자기 노력의 열매를 갖고 우리가 과연 하나님에 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들은 다 불타 없어질 공력이기에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서는 것이고, 그로 인해 주를 볼 수 없습니다. 14b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 왜 화평함과 거룩함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는 걸까요? 의와 평강의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주를 볼 수 있겠어요.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이 외면하신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그 가는 길에 지뢰 같은 위험 요소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식별해내어 하나하나 제거하고 피해 가야 합니다.

많은 위험 요소 중에 오늘 본문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위험은 은혜의 상실입니다. 15a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그리스도인들의 많은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공해 주신 모든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 있어야 힘이 납니다.

대게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시험으로 의한 낙심과 불신앙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 율법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늘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은혜를 사모하겠지만, 자기의 의를 내세우기 시작하고 그런 자신의 행위에 얽매이며 사람들을 의식하다 보면, 은혜가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일을 잘 해내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면 자연스럽게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요. 그로 인해 신앙의 동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은 없는 형식만 남는 거예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은혜로운 공동체라면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뒷걸음치거나 떠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지체들이 은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 은혜의 영역에 머물도록, 그래서 그것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격려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공동체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두 번째 위험은 쓴 뿌리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위험 요소입니다. 15b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쓴 뿌리란 무엇일까요? 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사악한 영향을 끼치는 교훈이나 인물을 의미합니다. 15절 하반 절 말씀은 죄악에 물든 성품이나 거짓된 주장, 세상 욕망을 마치 진리인 듯 가장하여 주장하는 자들이 성도를 뒤흔들고 그들의 신앙을 빼앗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공동체도 광야에서 이들 쓴뿌리들로 인해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이들이 교회 내로 들어와 많은 영적인 피해를 주었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이단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내적으로 영적인 도전을 받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이단들의 횡포는 외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한국의 교회를 왜곡된 눈으로 보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쓴 뿌리가 내리지 않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을 제대로 배우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단은 성경을 자기식대로 기가 막히게 새롭게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들고 옵니다. 그러니 성경을 모르면 새로운 성경 지식에 현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상고하고 늘 배우기에 힘쓰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쓴 뿌리가 뿌리내릴 수 없는 좋은 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 번째 위험은 세속주의입니다.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음행과 망령됨은 육욕적이고 세속적이며, 영적인 복보다는 온갖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이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좇아갑니다.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에 빨대를 꽂아놓습니다. 소위 뱀파이어 크리스천입니다. 죄 사함을 위해 예수님의 피만 필요로 하는 교인들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무게 중심은 세상으로 쏠려있어요. 이처럼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얼마나 추잡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끝은 파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16절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영원한 것에서 떠나 세속적인 것으로 향하게 하는 육욕적이고 불 경건한 경향을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속주의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에서입니다. 에서는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쌍둥이 동생 야곱에게 장자 권을 팔았던 자였습니다. 장자 권은 다른 형제들보다 유산을 배로 더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요 영적인 유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 권의 축복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을 때, 에서는 그 일을 가볍게 여겼을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막상 야곱이 축복을 가로채는 일이 현실이 되자 에서가 억울해하면서 돌이켜보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 권을 팔아넘긴 에서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인 유산을 가볍게 여기면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을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여전히 많은 에서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현세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고, 육체적인 것에 굶주려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잃어버릴 수 밖에요. 이것이 사탄이 깔아놓은 함정임입니다. 이 전략에 말려들어 에서처럼 망령된 자가 되지 말고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단절된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타락한 사람들을 죄로부터 거룩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묶어주는 힘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세상과 맞서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갈 때, 끝까지 믿음의 경주에 임할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 안에 있을 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으로, 사람과는 화평함으로 우리의 가는 길을 저지하고자 하는 세상과 맞서 이 경주를 멋지게 마감할 때, 우리는 마침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한 목표를 갖고 오늘도 서로를 돌아보며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달려갑시다. 이것이 교회공동체의 힘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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