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설교동영상

기쁨이 있습니까? 행 8장 26-39절

by 최수근 2019. 2. 18.

2019년 2월 10일 주일설교동영상

[기쁨이 있습니까? 행 8장 26-3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생명교회 최수근 목사

지금 영적으로 매우 유효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주님보시기에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한 오늘 우리들의 모든 열심들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열심일 뿐입니다. 그것을 종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향한 위안이요 만족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의 종교성은 예수님 당시에도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뿐 아니라 사도들도 대적했고, 이와 같은 갈등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열심히 하노라고 하지만 주님을 대적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나옵니다. 이 사람의 행동과 변화 속에서 영적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높은 직책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능력과 지성과 인맥 등 골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기에 큰 재산을 관리하는 지위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상류층 사람으로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다 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야망과 높은 지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하지 못했고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만족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교도로 태어나 이교문화와 전통 속에서 자랐지만 이교적인 배경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것을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것입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이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신을 섬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상의 허망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받기 합당하신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유일하고 참되신 한분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의 배후에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능력과 지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지적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7:21 아덴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이들이 왜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을 보였을까요? 자신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최신의 종교, 최신의 가르침을 쫓아다닙니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똑똑한 현대인들은 낯선 가르침에 관심을 보이며 흥분합니다. 이 사상 저 사상 찾아다니고, 가장 새로운 선생과 가장 새롭고 신기한 것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 신선함도 사라지고 또 새로운 것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식욕을 쫓아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그가 가지고 누리고 있던 것들 속에서는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이 유대교였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했던 도덕적이고 지적인 길잡이를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율법이 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교의 614개의 규정을 최선을 다해 준수했고 세심하게 이행했습니다. 그는 아주 순전하게 유대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삶이 종교적 삶이었습니다.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갈 정도였습니다.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장기간 자리를 비어야 하는데 상관치 않고 예루살렘에 다녀올 정도의 열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예루살렘에 다녀왔는데도 그에게는 만족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더 깊은 교훈과 지식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훌륭한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 그 위험하고 어려운 여행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종교를 바꾸고 아주 순전한 마음으로 유대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자신에게 있음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까지 절기를 지키러 떠난 건데 여전히 모든 것이 명확해지지 못했고,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갈증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서 사본을 구하여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며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자서라도 성경을 읽고 연구해 봐야겠다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는 답을 원했고, 빛을 원했고, 지식을 원했고, 평안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가면서도 고민에 빠져 있었고, 진리에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안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비극은 당연히 복음을 거절한 모든 유대인들의 비극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질문과 모든 필요에 충분하고도 완벽하며 온전한 대답이 되는 사건이 이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는데도, 그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무 만족이나 소망 없이 낙담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종교만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의 비극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그의 동족들을 한번 보라고 하면서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2). 유대인들은 아주 열성적이었고 아주 예민했으며 아주 꼼꼼했지만 지식을 좇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유일하게 만족을 주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식 없이 열심을 내는 것보다 더 큰 힘의 낭비는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왜 힘써 자기 의를 세웠을까요?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처지였고, 에디오피아 내시의 처지였습니다. 또한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규칙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면, 어떤 일은 금하고 선한 일은 힘쓰면, 몇 가지 죄를 피하면, 어는 정도 헌금을 내면,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 전적으로 경건한 열심을 내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힘써라는 말이 잘 표현해주고 있듯이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과 저의 보잘 것 없는 경건으로 과연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결코 충분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율법의 문제나 외형의 문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2:30). 하나님은 절대적인 완벽을 요구하십니다. 율법의 한 조항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율법 전체를 지키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의의 차원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내시는 새로운 지식, 더 고상한 지식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의로워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들의 궁극적인 비극을 생각하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최고의 비극은 이들이 녹초가 될 정도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노력하면서도, 정작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은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에서 답을 알고 있는 사람 빌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의 사자의 명을 받고 광야 길로 달려 나온 빌립이 내시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사야의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있던 내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그는 여전히 찾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처지였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빌립이기에 행색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회적 지위를 보더라도 빌립은 그와 어울리는 사람을 아니었지만 내시는 자기가 읽고 있던 내용에 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허용한 것을 볼 때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수준이 이르지 못하는 사람의 말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왜 종교지도자들이 반대했습니까? 단순히 보면 이런 이유입니다. 자기들 수준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열려 있지 못하면 그래서 폐쇄적이면 우리는 결코 복음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묻습니다. “선지가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빌립은 이사야서의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디딤돌로 하여 빌립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대속, 그리고 부활의 이야기, 즉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1631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아들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 준비해 놓은 그 의를 선물로 거저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빌립을 통해 복음이신 예수님을 접하기까지 바로 여기에 에디오피아 내시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다녀왔으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교회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이 그토록 애쓰고 노력하며 여행까지 했어도 발견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단순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가진 한 종을 보내심으로 주셨습니다. 그 간절함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드디어 그에게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왜 만족과 기쁨이 없었는지? 여러분은 내시가 얻은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내시가 한 일로도 충분히 않았다면 그 행동을 반복하는 우리들 또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의미 없는 왕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동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믿음의 길에서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