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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라감: 빌 1장 8-11절

by 최수근 2019. 2. 26.

2019년 2월 24일 주일설교동영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라감: 빌 1장 8-1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대부분 자신이 높아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순간부터는 자기중심적 목적에서 벗어나 타자를 향한 다른 차원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그 삶을 새롭게 배열하시고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반응하며 하나님의 부르심 그 목적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면, 실은 거저 되는 일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 성숙이 요청됩니다.

이것은 6절의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만일 말씀대로라면 그래서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의 일이기에 틀림없이 완수될 일이라면 우리가 노력하거나 기여할 여지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하실 텐데.

사도 바울은 이처럼 모순되는 요청을 하곤 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라고 요구하고서는 또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인 행동을 명하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방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해결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일하게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가시지만 그 행동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노력과 활동에 의해 계속되도록 우리들이 행해야 할 것들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힘입어 자신의 삶을 통해 어떤 일이,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비전을 보여주셨어도, 여기에 나의 헌신, 나의 자원, 나의 변화, 나의 순종이 심어져야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도 사람들은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하라는 명령입니다. 물론 착한 일, 구원의 역사를 우리 속에서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어떤 일을 행하고자 하는 책임 있는 존재로 부르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꼼짝 말라는, 무심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평가할 때 빌립보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여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망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참여하는 일에는 그에 따르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감당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영적인 성숙, 성장이 필요합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고, 끝까지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성장에 대한 갈망과 성장이 꾸준하게 이루어진다면 많은 상황들이 지금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성장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장이 현저하게 이루어지는 부분을 말합니다. 식물로 말하면 그 줄기나 뿌리의 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장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고전 15: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 인데 그 중에 제일을 사랑이라.” 정확히 하면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하셨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사랑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부터 우리의 성장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안에 사랑이 풍성하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한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어보였습니다. 8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들을 사모한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사랑이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그래야 movement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랑이 빌립보 성도들에게서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도의 역동적 삶에 출발점이고 종착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행동은 공허함 그자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단순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과 지식에 의해서 통제되고 다스려질 수 없는 사랑은 우리를 왜곡된 자리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왜곡된 사랑을 너무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감정에 이끌려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기분에 따라 순간 식어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실족하는 이들을 보면 대개 지식, 즉 영적인 지식이 결여된 경우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의 결핍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인해, 그리고 현재 펼쳐지고 있는 세상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이것을 피하는 길은 진리 자체와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삶 가운데 마주치게 되는 모순과 실망과 문제에 더 자신 있게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바로 알고 그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우리가 마주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부요함과 함께 성도로서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만큼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구원의 지식이 없으면 성숙함에 이르는 진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주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앎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면서도 지식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적 성장과 성품의 성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들은 주변 사람을 너무도 힘들게 만듭니다. 바울은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총명이 풍성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헬라어로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는 분별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분별은 참으로 중요한 영역입니다. 지식을 지혜로움과 연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많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분별력이나 지각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바울은 지식과 모든 총명이 풍성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사랑에 올바른 지식과 총명을 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동에 있어서 옳은 것과 그릇된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을 분별해 낼 수 없습니다. 무엇을 사랑해야할지, 어떻게 사랑해야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번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 이 두 가지, 지식과 총명이 더해지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디아페로라는 말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질적으로 우월한 것”, “지극히 중요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식과 총명이 풍성하게 되면 지극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겪는 많은 어려움은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에서 옵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려내지 못하고, 부차적인 문제에 자신을 내어줌으로 힘을 낭비하고 시간을 허비하기 쉽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들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귀한 시간을 본질이 아닌 주변잡기에 낭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 지식과 분별력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상황들을 분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나가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10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이 임하면 우리가 그분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날에 우리가 허물없이 순수하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즐기는 죄들, 우리 속 깊이 박혀 있는 습관들, 거룩함에서 우리가 실패하는 것들에 도전하고, 그것들을 거절하고 멸시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맛서야 합니다.

슬쩍 눈감아 주지 마십시오. 타협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리스도인체 하면서도 그것들에 결연하게 맞서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거룩한 열심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세워가야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자리에 서 있을 때 우리 주님은 동행하십니다. 무엇보다도 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날까지 이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만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의의 열매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아무런 생명도 소유할 수 없고,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우리의 마침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날마다 순종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게을러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부르심의 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사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고, 아들 예수님이 일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그 사랑이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심장의 뜨거움으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흘러갔습니다.

그 사랑을 오늘 우리도 받았습니다. 이제 자기를 희생하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성장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하여 이웃을 향해 따뜻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할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진실하여 허물없이그 앞에 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지극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초점을 맞추어 우리의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의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날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성숙한 성도로 설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책임 있는 행동으로 나아간 자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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