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4일 주일설교동영상
[불신을 넘어 부활신앙으로:마가복음 16장 1-1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거리낌 없이 다른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부담스러운 영역입니다. 이성과 지식으로 파헤치기에는 버거운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자유주의신학은 역사적 예수와 신화적 예수를 갈라놓습니다. 쉬운 길을 택한 것이지만 실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선 자멸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단순히 집단 최면의 종교적 현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인류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헛된 것으로 전락해 버릴 겁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선포합니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17b에서는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9에서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은 허탄 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울은 이어지는 고전 15:20에서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새 새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부터 시작해서 매년 부활절을 기념하면서 부활 신앙을 되새기고,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여 왔습니다. 교회는 부활 신앙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이천 년 전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의 상황을 보면 당혹스러워집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간간이 들려오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우왕좌왕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환호와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펼쳐질 일들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속에 아직도 갇혀 있었던 거죠.
안식일이 지나고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어 그곳에 간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장례를 마무리하기 위해 간 것뿐입니다. 그러니 울적한 마음으로 갔을 것이고, 가는 내내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어떻게 굴려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갈까 염려하며 갔던 겁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돌이 굴려져 무덤 입구가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흰옷을 입은 천사가 무덤 속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하였습니다. 두려워 떠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6절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 순간 여인들이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그런 여인들에게 천사가 7절에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전하였지만, 여인들은 그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8절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중에서 부활을 믿고 기대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듯 여인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한 것은 이해가 가는 행동입니다. 이걸 어떻게 여인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론가 없어져 망연자실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마리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녀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친밀하게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마리아는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를 뵈니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급하게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마리아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던 두 명의 제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처음에 두 사람도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대화하며 걷다가 여관에 들어가 예수님께서 떡을 나누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참으로 기뻐하며 그들 또한 가던 길에서 돌이켜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어찌해서 제자들은 여러 증인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들었는데도 믿지 못한 걸까요? 그 현장에 우리가 서 있었다고 해도 제자들처럼 믿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마침내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그곳으로 오신 겁니다. 음식을 먹고 있던 제자들은 그들 앞에 선 예수님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며 지금 걱정과 불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 제자들의 마음에 샬롬을 전하셨습니다.
순간 어떻게 할지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손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자신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그들의 선생님이심을 보여주는 배려였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부활을 믿은 제자들을 예수님은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참으로 믿음이 없다. 너희들의 마음이 정말 완악하다.”
제자들이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예전에 부활에 대해서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진실로 귀담아듣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불신은 마음의 완악함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냐는 불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그렇게 마음이 굳어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완악함은 믿음의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아무리 진리를 들려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거부합니다. 적당히 잘라냅니다. 이렇듯 불신은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불신으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부활을 믿지 못했는데, 더군다나 지금 그 사건과 수 천 년 떨어져 있는 사람들보고 믿으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 데다 역사인지 신화인지 분간하기도 어렵고, 그곳에 서서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또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세상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믿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불신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 20장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우리의 믿음이 뭘 봐야 믿는 것, 그것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았다고 해서 다 믿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예수님 부활 당시에도 대제사장에게 매수되어 헛소문을 퍼뜨린 경비병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 가장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목격하였으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대제사장이 건넨 돈을 선택했고, 결국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고, 느껴도 세상에 더 좋은 가치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의 삶과 생각을 지배해버린다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가치를 우선하다 보면 반드시 예수님을 부정하게 되어 있어서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선물을 누렸습니다. 왜 이들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 넘는 불가해한 일에 마음을 열었을까요?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그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무덤이 비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빈 무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음모론만 퍼트려지게 했을 뿐입니다. 결정적인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결정적인 부활의 증거는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이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책을 통해 수많은 위인들을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단순히 지식을 알고 인지하는 것과는 격이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길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이천 년 역사를 통해 수많은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망상이라고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은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기독교 신앙을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없어도 증거를 무시하고라도 맹신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이들이 볼 때 부활 신앙은 집단적인 맹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집단 최면에 의한 망각이 아닙니다. 그때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했었기에 자리잡은 믿음입니다. 그 만남의 감동이 세대를 통해 전달되고 또 전달되고, 성령님께서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심으로 오늘까지 부활의 감동과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단지 종교적인 집단 맹신만으로 이천년을 지탱해 올 수는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개인적인 확신 속에서 그런 결과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할만한 대단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분히 주관적인 이유일 뿐이고, 단지 지적으로 보이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을 뿐입니다.
저는 소위 무신론자인 철학자, 종교학자, 지성인이라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뭐 어쨌다는 것입니까? 자신의 중요한 인생을 어쩌면 그와 같은 하찮은 주장들을 무책임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내어 맡길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고귀한 우리의 인생을 결코 책임지려 않습니다.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성경은 숱한 반대에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오늘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부활의 가능성에 귀 기울였고 마음을 열었던 많은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셨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들의 인생은 변화되었고, 죽음을 넘어선 소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주셨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도록 하나님 자녀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과 소망 안에 거하지 못하고 그저 이 땅의 가치에 목메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영원토록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끝은 자명합니다. 죽음입니다. 심판입니다.
우리는 그 무지함, 완악한, 불신의 자리에서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덧없는 세상의 소리에 안심하고 그냥 앉아있지 마십시오. 그것은 똑똑하고 현명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끝내 죽고 맙니다. 신속하게 마음의 완악함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의미 없고, 부정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불신을 넘어 부활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부활 신앙의 능력으로 섭시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증거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나가서 외칩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자들에게 전합시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소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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