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 주일설교동영상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엡 4장 13-14절]
얼마 전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보다가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 환우 모임(보암모) 회원들이 삼성생명 고객센터를 점거하고 시위에 돌입한 지 1년이 지나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삼성생명과 고객 사이에 암 보험료 지급에 대한 문제 제기로 공방이 이어지고 암 환우들이 급기야는 고객센터에서 장기농성을 벌인 겁니다. 환자들이 긴 시간 막무가내식으로 농성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건강한 분들도 아닌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었겠지요? 물론 여기에도 대기업을 옹호하는 여론과 암 환우들을 옹호하는 여론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일류기업이라고 하는 삼성과 연관되어 벌어지는 일들이 참 많아 보입니다. 좋은 일들도 있는 반면에 많은 이들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하는 어두운 면도 적잖아 보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 핵심경영진들을 모아놓고 신경영선언을 합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겁니다. 국제화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면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시리즈 광고를 진행하며 ‘세계 일류’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신경영선언’이 내건 대로, 삼성은 품질 우선으로 혁신했고 많은 제품이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로 경영권이 이어지며 삼성은 한국사회에 부정적인 측면 또한 여실히 보여주었고, 결국 아들은 국민을 향해 수차례 사과하며 몸을 낮추었음에도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업이 필요로 여기는 것들만 바꾸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제품으로는 일류기업이 되었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지만, 정작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 생명 살리는 일에는 방관자가 된 것은 아닌지. 산업재해로 일 년에 수천 명씩 죽는 불행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요.
저는 삼성의 모습에서 한국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계 최고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장의 최고점을 찍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5명당 기독교인이 한 명꼴입니다. 그런데도 이 땅에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심어주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상황까지 왔을까요? 삼성이 기업으로서의 성숙함이 부족하듯이 한국교회 안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성숙함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 속에서 교회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나아가기보다는 부흥에만 몰두한 결과가 아닐까요? 영적 부흥이라기보다는 외적 성장에 몰두하였기에 세속화의 거센 물결이 교회를 덮어버린 겁니다. 순전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것은 한국교회를 넘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거듭난 존재입니다. 세상과는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척져야 할 원수가 아니라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쉽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는 모여서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그런 열정이 게토화 되었고, 세상은 그런 크리스텐덤으로서의 교회를 바라볼 때 결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보지를 않습니다. 세속화된 이익 공동체로 볼 뿐입니다. 교회개혁을 외칠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이런 우리들의 모습과 함께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묵상해봅니다. 감람산에서의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는데, 그렇게 자기를 다 내어주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이 이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러기에 처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열심을 품어보셨습니까? 성숙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변화, 성장을 위해 오늘 여러분은 무슨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에베소서 4장 17절 이하의 말씀을 나누면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의지적으로 변한 척할 때가 많습니다. 변화된 것처럼 시늉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황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매번 신앙적 한계점에 이를 수밖에 없고 결단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다시 되돌이표인 것이죠.
그런 우리의 약함을 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고 성숙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지속적으로 원하십니다. 그 목표점은 나는 간 데 없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숙함과 온전함의 자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오해 가운데 하나가 이런 믿음의 성장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간이 해결해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행동이 먼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4장 13절을 통해 성숙한 삶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말씀하였습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과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믿음과 지식의 통일성을 말합니다. 만일 믿음과 지식이 다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신앙은 자신의 선택이며 자기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나의 필요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믿음조차도 자기들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끝없이 믿음이 왜곡될 수 밖에 없어요.
우리의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믿음만으로는 우리가 자만하기 쉬우나, 이 지식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세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도 주관적이며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며, 주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 부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헌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는 바로 이런 신앙과 지식의 일치 위에서만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믿는 것이 아닌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즉 약속 위에 세워지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에 실패하는 이유는 이런 믿음과 지식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이 단계를 통해서 바울은 그 다음 단계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이라는 단어는 성숙한이라는 의미로 쓰여집니다. 믿음과 지식의 일치를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를 이룰 수 있지, 이것 없이는 결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행동에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어도 내면이 결코 변화된 것이 아니라면 바닥이 쉽게 드러나고 말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성숙한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인 나는 죽어, 장사지내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 즉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된 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과 성숙함이 없으니 늘 옛사람의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자기가 우선되고, 자기 고집대로 하고, 형제와 자매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인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에요.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티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는 여기에서 성숙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는 단순히 해맑고 순전한 아이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쉽게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빗댄 것입니다. 유아스러운 사람인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 거룩함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작정하고 달려들 때, 그런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을 분별할 수 없어 그것에 빠져들 위험성이 높아져서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밀려 요동치지 않게 하시기 위한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동치 않은 견고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나라에 걸맞은 성숙함을 겸비하지 못함으로 견고함의 은혜를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수없이 널을 띠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지켜주시는 은혜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안을 상실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십니까? 혹여나 한결같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볼 수 있어야 우리는 더는 허망한 것들을 쫓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흔들리고 요동치다 보면 영적인 틈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 틈을 사탄은 쉽게 공략하려고 달려들 겁니다.
이렇게 요동하고 있는, 흔들리고 있는 이들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있기를 말입니다.
시편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에 자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고백이 있는거예요. 이렇게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 서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땅에서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렇게 주의 일에 힘쓰며 살아갈 때 주 안에서 헛되지 않고 아름다운 결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에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변화를 이루어갑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릅시다. 더는 허망한 것을 쫓아가는 헛된 삶을 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유효한 삶을 삽시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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