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8일 주일설교동영상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장 1-1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요즘처럼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가 쉬울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SNS상에서 그 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맘에 들지 않거나 실수하면 용서가 없습니다. 여기 편승해서 얍삽한 정치인들이 이런 사람들의 분노를 자기 구미에 맞게 이용하곤 합니다. 거기에 또 일반 군중은 부화뇌동하고 정죄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도 사람들의 정죄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정기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기 위해 그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여러 제자들과 군중들이 떠나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며 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잡힌 그녀는 예수를 공격하기 위해 그녀를 희생시키려고 하는 적대적인 남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많은 군중 앞으로 힘없이 끌려 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완전히 취약한 상태였고 수치와 모멸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실 재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를 덫에 걸리게 하는 것이었지 그녀의 개인적인 삶에는 전혀 배려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는 이미 사형을 가할 생각이었고, 예수가 직접 그 판결을 내려주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에게 이 여인을 정죄하고 율법을 집행하기 위해 법적인 주장을 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여인은 여인대로 각각 위기에 놓였습니다. 여인은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마땅한 상황에 부닥쳤고,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거리를 찾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기 때문입니다. 6절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엄격한 율법에 따라 “그 여자를 돌로 쳐라” 하면 율법에 따라 그 자리에서 정의가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지지해서 돌로 치라 말씀하신다면, 자기 삶의 방식 그리고 그간의 설교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돌로 쳐서 죽이라 하면 로마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결과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형의 판결권과 집행권은 로마 사람들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고발할 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잘 알려진 대로 죄인들에 대한 그의 자비와 사랑으로 처벌의 중지를 주장한다면, 그는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될 것입니다. 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그 답을 거부하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이들에게 답을 주시기보다는 먼저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대해 너무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무언가를 쓰시며 사태를 지연시키는 듯 보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대답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들의 재촉에 예수님이 다시 일어나셔서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처형하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조건은 그 형벌의 집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습니다. 군중들도 당황했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때 누군가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가장 연장자이며 고발하는 자 중에 서열이 가장 높은 자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어 한 사람씩 부담스러운 자리를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결국, 고소자들과 군중의 무리가 다 떠나가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용기가 있었을까요? 오늘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 주위로 몰려들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많은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바쁩니다. 아마 오늘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돌로 칠 자가 많치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면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가자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는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죽음의 직전에 몰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제 여인은 그 상황을 지켜보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지 귀를 기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결코 죄를 가볍게 다룬 것이 아니라, 또한 그녀가 결백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분명 여인은 간음을 저질렀고, 이는 벌을 받아 마땅한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으로 하여금 과거의 죄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한 죄인에게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로서의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은혜가 사람들을 새롭게 만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간음을 범한 여인에게 베푸신 용서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수치스러운 십자가에서 온 세상의 죄, 즉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 혹은 살아갈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갚을 빚이 없습니다. 대속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셨듯이, 그래서 그 용서함을 입은 우리는 낭가서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 관계에서도 물론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한 인식은 우리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될 때 줄어들게 됩니다. 아니 인식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 여인의 드라마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없을 때, 우리 스스로 고소와 정죄로부터 자유롭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에 관한 이 드라마는 내가 이 여인이 되고 나 자신의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묵상해볼 때 비로서 힘을 갖게 됩니다. 이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을 지금과는 다른 눈길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긍휼의 눈길로 말입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야기 속에서 나의 죄악 된 삶의 상태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영적 메시지를 발견하고는 만족스러워합니다. 감격해하고 그 은혜를 찬송합니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 회개한 자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찾은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씨름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의심과 편견과 불편의 눈길로 바라봅니다.
또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의 종교적 기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반응들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움에 대한 우리의 건강한 헌신이 때로는 사람들의 개인적 삶의 상세한 부분들에 대한 광적인 편견으로 변하지는 않는지? 그래서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즉시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 23:23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은 놓치면서 종교적 순종의 작고 세부적인 것들은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우리의 신앙적 삶과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밸런스가 맞추어질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품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대적하지만 사람은 긍휼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죄인들을 용납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은혜는 항상 받을 만한 값어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은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나의 죄인 됨을 언제나 인식하며 그 불의함의 자리에서 용서하사 품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쏟아지는 많은 뉴스들을 보며 사람들을 비난하고 욕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약한 자들의 허물을 지적하기를 즐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작은 불편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을 들쑤셔 놓고 있지는 않고 있는지요?
그런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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