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주일예배
[하나님 나라를 살자: 마가복음 4장 26-32절]
요즘 “영끌” 이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한다는 말입니다. 투자자들은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벌수도 있겠지만, 원금손실뿐만 아니라 더 큰 빚을 질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가 망하는 이들이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는 예외일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왜 계속될까요?
반면에 어떤 이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뭔가 새롭고 나아질 상황을 기대하며 죽어라고 일하지만 허구한 날 힘들고, 부족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 걸음뿐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고, “난 왜 이럴까?” 자신의 삶을 힘들어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구조적인 모순 때문일까요?
성경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솔깃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다. 열심을 다해 살아가지만 늘 불만이 있는 자들이 좋아할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도 거둘 수 있다. 이것은 대박을 노리는 이들에겐 기막힌 소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다른 작동 원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이 땅의 질서를 가라 엎는 과히 혁명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대단하고, 매력적이고, 흥분될 만한 것을 찾고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오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아닌 예수님에게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기적들로 인해 모였던 것을 보게되요. 그러다가 예수님 사역의 본질인 고난과 죽음이 드러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뭔가를 기대하고 왔는데 보니까 그렇지 못했던 거죠. 그들은 뭔가를 도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뭔가를 도출해내기를 기대했습니다. 바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를 요구합니다. 뚜렷한 성과, 목표가 도출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질서입니다. 초특급 속도전이에요.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자리이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늘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그것을 하나님이 확증해주시기만을 기대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다른 그림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실은 바른 모습인거죠. 이것을 보기 위해선 다른 패러다임이 요구되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란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에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땅에 뿌린 씨앗이 스스로 자라난다는 사실입니다. 27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씨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며 자라서 결실합니다. 이것은 씨앗 속에 생명력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했고, 사람들은 느낄 수 없었지만 씨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결실을 맺듯이 커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씨 뿌린 사람은 그 과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결실을 기대하며 추수 때를 기다리는 거죠.
이렇듯이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의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끊임없는 활동을 예측하면서 끈기 있기 추수때를 기다리는 믿음만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밀이 사람들에게 걸림돌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눈여겨보지 못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씨앗 속에서 가능태, 즉 미래에 이루어질 완성된 모습을 예견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30-31절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겨자씨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직경이 1mm, 무게는 1mg정도이니 매우 작습니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1.5m까지 자라고, 어떤 종자는 3m이상 심지어 7m까지 자라기도 합니다. 나무 수준인거예요. 이 씨가 자라날 결과에 비해 겨자씨는 엄청나게 작은 거죠.
이렇게 작은 겨자씨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와 같다고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입니다. 그러나 당장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지 못한 겨자씨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덮고도 남는,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현재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 임하여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시골 동네 나사렛의 목수 출신 젊은 예수에게서 온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큰 나무를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뜩이나 형편없어 보이는 제자들과 빈약한 교회를 통해 그런 원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고, 박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향해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조차 못하는 작은 겨자씨 같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서 역사하며, 확장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그래서 최종적 모습을 가지고 참으로 파워풀하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라면 사람들은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작은 겨자씨와 같이 미약하고,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오기에 사람들은 쉽게 이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참모습과 하나님 나라가 가려진 상태로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외향적 가치 중심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모와 외적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기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함정입니다. 여기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보잘 것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편견을 넘어, 작은 것처럼 보이고, 미약해 보이는 것이지만 그러나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작은 씨앗 속에 있는 “엄청난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패러다임을 뒤집어버리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듣지 않으면 시작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음에 대한 중요성은 이미 그리스도인된 이들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난 알아. 난 들었어. 다 소용없습니다.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반복적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듣는 것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오늘 내가 무엇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이 두 질서의 결과를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멸망의 길이요,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축복의 길입니다.
또 어떻게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심으로 귀 기울지 않고 건성으로 듣는다면, 그리고 들음으로써 그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습니다. 반면에 진실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한다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막 4:24-25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말씀에 부요한 자가 될 것인지, 세상에 부요한 자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을 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을 닫는 사람은 빈곤해질 것입니다. 마음을 닫는 자들은 겨자씨만한 하나님 나라의 가능태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현재에는 보잘 것없이 작은 모습으로, 예상 밖에 감춰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그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결과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 결코 메울 수 없는 질적 차이를 빚게 됩니다.
이 작은 시작 속에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도록 명하십니다.
이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끝까지 소망함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영적으로 무장되어 오늘 이 땅에서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살아갑시다. 세상의 원리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고전 15:50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주는 부요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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