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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예수 믿는다면서 되돌이표? 엡 4장 17-24절

by 최수근 2021. 3. 14.

2021년 3월 14일 주일예배

[예수 믿는다면서 되돌이표? 엡 4장 17-2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의 마음은 단호함보다는 우유부단할 때가 더 많아 보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싶고 저렇게도 해보고 싶어 합니다. 물론 같은 방향의 것이라면 다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상반된 성격의 것이라면 어떤 하나는 내려놓아야 한 가지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갈등하다 보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부닥치게 되겠지요.

신앙의 길에서도 이런 유혹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가기보다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경계선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해요. 넘 열심히 하면 광신도 취급받을까 살짝 염려하는 거죠. 그러니 적당하게 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바람일 뿐이에요. 성경적 신앙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고집부리며 중간지대를 택해서 가려고 하니까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실종된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조화에는 향기가 없는 것처럼 가장되고 위선으로 중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일수록 뭔가 있어 보이지만 거기에는 정작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사회라는 삶의 자리는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나라 거룩한 시민으로서 삶이 전환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 지점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매번 되돌이표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은혜받고 변화 받은 것 같은데, 또 어느 순간 보면 예수 믿기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남들은 저만큼 간 것처럼 보이는데 계속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증상은 되돌이표 증후군입니다. 등산로를 잃어버리면 그 근처를 맴돌게 되는 것처럼 길을 잃어서일까요?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입니까? 시원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하기로 마음먹고 결단했다면 신앙에 대한 수용의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만 먼저 내어버림에 대한 측면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의 달음박질을 잘하려고 하면 지금까지 신나게 함께 행해왔던 것들의 많은 영역을 내려놓아야 수월하고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1b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바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버릴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오늘날의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방인입니다.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 분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입니다. 왜 그들은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을까요?

허망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허망한 것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있어도 곧 없어질 것들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허망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우상을 섬기는 것이지요.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허망한 우상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들은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1:23에 말씀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다시 말해 허망한 것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피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게 되게 하셨습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지만 이방인들이 허망함을 쫓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에게 세 가지 문제가 일어난 겁니다. 총명이 어두워졌습니다. 무지함과 강퍅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강팍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총명이 밝다고 믿고 있습니다.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수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야말로 정작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에 자기가 주인이고 싶어 결코 그럴 수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어요. 무지하게도 허망한 것에 사로 잡혀 다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데 그걸 보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외인들은 생명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허망한 것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뭔가를 이룬 것 같지만 결코 어떤 열매도 없이 썩어질 것만을 추구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것이 이방인의 실체요, 세상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번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끔찍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허망한 것에 너무나도 쉽게 속습니다.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 안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의 말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제대로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여러분은 무엇을 듣고 배우셨습니까?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말씀에 우리는 수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22절 이하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에베소의 교인들이 배운 내용들입니다.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듣고 배우고 말씀에 수없이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삶에서 실행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씀이 실천될 때 예수님의 말씀처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로서 신앙의 견고함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죠. 그러나 실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이고, 매번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세 가지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옛사람을 벗어버리십시오.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사람이 자동적으로 벗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결단해야 합니다.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구습을 따르던 자, 다시 말해 옛 자아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고,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순종하여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것이 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옛 자아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피조물의 삶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여전히 되돌이표처럼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 거죠.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옛 사람, 자아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체이면서 주를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심령을 새롭게 하십시오.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예수님께서 마 5-7장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내용들을 보면 대부분 마음의 것들에 대해서였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7: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7:23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는 옛사람, 예수 믿기 이전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성령께서 묵은 땅을 갈아엎어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 자신의 수련으로 마음이 결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새롭게 해주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셋째,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옛사람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한 이후에 새 사람을 입으시라고 권면합니다.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도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재창조된 거룩한 성도인 것입니다. 옛것을 내려놓고, 마음의 밭을 기경 하고, 의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는 삶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이 말씀을 붙잡고 결단하고 나아가 보지만 어느 순간 저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 올라오는 자아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이 일은 매일의 영적 전쟁입니다. 날마다 감당해야 하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지금 우리는 느긋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군기 빠진 군대처럼 영적 전선에 숭숭 구멍이 나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일의 수행을 위해 치열하게 피땀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치열하게 그 자리에 동참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위기에 다 도망가버렸습니다. 심지어 부인까지 하잖습니까?

다시 영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였고, 사도 베드로도 벧전 1:17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하였습니다. 사탄이 팔짱 끼고 관망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공작 활동 중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는 실족합니다. 되돌이표 그리스도인이 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에 거룩한 떨림으로 임하여 한걸음 한걸음 영원한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 우리를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영적 자존감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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