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9일 주일설교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장 7-15절]
최수근 목사
안시성은 요하 유역에 세워진 고구려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성입니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성주였던 양만춘 장군의 지휘 아래 그들의 파상공격을 막아내고 물리칩니다. 작년 9월에 개봉된 『안시성』이라는 영화를 통해 그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전쟁에서는 성문을 부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습니다. 공격하는 자들과 공격을 막아내는 자들은 성문을 공략하려 하고 막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 성문이 뚫리면 일거에 성내로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문은 성내에 있는 이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집마다 문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요즘은 담장도 없어지는 추세이기에 문은 안전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을 사용한 흔적은 이미 우리나라만 하더라고 신석기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암사동 유적지에서 원초적인 문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건축적 의미에서의 문의 개념은 ‘하나의 공간적 영역을 이루는 경계와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통로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자와 양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자기 자신을 문이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으로 하면 양 울타리가 있고 그 울타리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면서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양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문이 있는 자신이 그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며 그 문 안에 있어야 보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게 되면 9절에서 그 결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두 가지 놀라운 선물을 받습니다.
첫째로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양 떼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위협과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공성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성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성문의 역할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거센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을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구원은 죄로 인한 잃어버려짐으로부터도 구원되는 것입니다(눅 15:6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예수님은 이 구원에 이르는 문이십니다(9절; 시 118: 20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단언컨대 예수님 외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다른 문은 없습니다.
둘째로 그 문으로 들어가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기에 꼴을 얻게 됩니다. 이는 안전함과 양육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양은 목자의 보호 아래서 그가 주는 음식을 먹고 영양분을 섭취함으로써 자랍니다. 우리는 안전이 울타리를 두른 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목자에게 가까이 있음으로 확보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담은 단지 물리적인 보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안에 있을 때나 그 밖에 있을 때, 단 목자이신 주님과 동행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떠나 그 문과 우리 안에 있지 않을 때, 주님의 지켜주심 가운데 있지 못할 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이들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강도와 목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따라가면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들, 기독교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기 왕국을 만들어가는 그런 자리에 있다면,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주님의 오심 안에서 예비 된 축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주님의 성육신은 분명한 구원의 목적에 있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가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더욱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풍성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선언하시면서 양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실현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의 차이는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언하시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기 위해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을 양들이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목자가 고난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목자가 아닙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니기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자기 목숨을 더 우선 시 하는 것입니다.
12절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절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양들을 위한 자기희생 속에서 지도력에 대한 참된 모범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지도자들은 자신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도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들은 삯꾼이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위탁받아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원리가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 생활에서건 산업에서건 사업에서 건 아니면 지역 사회에서건 리더는 다음의 두 가지 중에서 하나의 길을 따릅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의 이익을 헌신적으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행해내지 못할 때 그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삶이지 공적인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공적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공적 신앙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로서 양떼인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생명조차도 내어놓으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대속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양의 문이 되셨습니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고 꼴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수 많은 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들을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문들입니다. 종종 건물에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바로 추락해서 죽는 사고들이 믿기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이 실은 그와 같습니다. 살길이라고 열고 나갔는데 바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모든 파상공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시는 성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양으로서 우리도 그 분을 알아갈 때 그분 안에서 우리는 더욱 풍성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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