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5일 주일설교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요 8장 31-36절]
최수근 목사
일본이 배상문제로 인해 야기된 갈등 때문에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함으로써 요즘 일본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이 지속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영화들이 몇 편 나와 여러 사람이 보았습니다. 봉오동 전투, 말모이 등이라는 영화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독립군, 한글을 보전하기 위한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고군분투, 이와 같은 일본의 압제에 대항해서 우리 선조들의 목숨 건 투쟁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나라의 자유, 삶의 자유, 언어의 자유!!!
인류의 역사를 보면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패트릭 헨리가 1775년 미국의회에서 외쳤던 유명한 말이기도 합니다. 요즘 홍콩도 자유를 바라며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로 나와 투쟁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랜 싸움을 통해 지배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나라도 맛보았고, 미국도 마찬가지로 맛보았습니다. 나라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그래서 자유를 얻었지만, 과연 사람들은 지금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면 자유의 기쁨은 잠깐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들은 또 다른 것들의 지배를 받고 그 억압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정치 체제든 이데올로기이든, 또는 물질이든 삶의 다른 형태들이 다시 사람들을 옭아매 버리는 것입니다. 자유를 위해 열심히 아니 목숨걸고 투쟁한 결과 자유를 얻었지만 다시 새로운 것에 종속되어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맘몬, 즉 돈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맘몬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매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돈이든 시간이든, 권력이든 관계에서든 삶에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합니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순간 새로운 사슬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속박에 대한 배경에 대해 성경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자유를 누리려고 했던 반역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모든 인간이 그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데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사탄의 지배 아래서 사람들은 신음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4절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쉬임없이 고통받으면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지만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 나는 길은 실은 우리 안에도, 이 땅에서도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온 의이신 예수님을 힘입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비롯된 우리 의는 오히려 우리를 율법의 덫에 가두어 더욱 힘들게 살아가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하면 우리 안에 패러다임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 안에 갇혀 있으면 결코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끊어내고 과거의 경험과 지식의 구조로부터 패러다임의 변혁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데 그 힘은 우리가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31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 제자의 출발점은 믿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하라”(메이네테)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살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경청, 묵상, 말씀의 실천 등아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어떻게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안다는 것은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역사, 십자가와 부활, 승천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심을 알고, 그것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선물로 여기고, 이제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드렸을 때, 그로 인해 주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때 나는 주님의 통치 안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헌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3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31절 이후에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발하였습니다. 33절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것이 실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믿었다가도 즉각적으로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말씀을 접하게 되면 믿었던 모습과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은 믿음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경청과 묵상, 그리고 믿음의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다시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믿었지만 거기에 그치고 다시 본래 종의 자리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말씀에 반박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34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유대인들이 자유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함으로써 죄를 범하였고, 그렇게 죄를 범함으로써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굴레에 얽매여 있는 자신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진리이신 예수님이 가리워졌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영적무지로 인해 진리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했고, 그 분 안에서 누리게 될 참 자유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영적 무지의 포로가 되어 방황하고, 수많은 오류와 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하여 주신 예수님을 알고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셨는데, 그 진리를 알지 못하면 여전히 억압의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예로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무지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될 때 그와 함께 삶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는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여전히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방법을 찾아다닙니다. 물질을 의지해보기도 하고, 향락에도 빠져보고, 다른 종교들을 의지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 구속하고,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 점에서 무엇보다도 인간을 가장 강하게 억누르고 가둬 두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아의 포로가 되어 영적 무지 속에 살면서 다른 것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어서 자기 부인이 요청되는 일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알게 되면서 우리는 왜곡되었던 나를 제대로 보게 되고, 자기로부터 비로서 자유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참으로 중요한 선물은 무엇보다도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사탄의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믿고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여전히 우리는 속고 살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오늘 진정한 해방의 기쁨이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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