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2일 주일설교
[목자와 강도: 요 10장 1-6절]
최수근 목사
사람 목자에 대한 기대는 성경을 통해서도 그렇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도 무너지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이 사람들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이처럼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소위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그들의 양 떼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 떼를 먹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들의 악행을 보면 양 떼를 먹이기보다는 오히려 양 떼 가운데 살진 양을 잡아먹었고, 그 가죽을 벗겨 자기들이 입었습니다. 결국은 양들을 실질적으로 돌볼 목자가 없어 양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슬프게도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친히 목자가 되어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그들 위헤 한 목자를 세워 먹이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겔 34장 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오랜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우실 목자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에서도 이스라엘 목자의 문제는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양 떼를 잘 먹이지도, 보호하지도 못했습니다. 자기의 배를 불리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예수께서 고치셨을 때 그들의 왜곡된 성향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지 못한 놀라운 일에 대해 손뼉을 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소경을 고쳤다는 이유로 즉시 예수님을 비난했고, 그들이 품어야 할 양인 소경을 예수님을 옹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공동체에서 쫓아 내버렸습니다. 그것은 직무유기였습니다. 이들의 악한 행동은 에스겔 34장 4절의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사람 목자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제는 그들을 진정으로 돌볼 선한 목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직무유기를 지적하시면서 예수님은 에스겔서 34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내 양 떼의 목자가 되시며 내 종 다윗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오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기는 양의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양을 치는 것이 경제생활의 주요소였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집마다 수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 마리의 양을 길렀을 텐데 이를 위해 마을에는 커다란 공동 우리를 만들어 두고, 밤에는 안전하게 우리 안에 양을 몰아넣고 밤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지붕이 없이 울타리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 문을 하나 만들어서 밤에는 문지기를 고용하여 문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문지기의 역할은 양을 절도나 강도, 혹은 짐승들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혹 문지기를 둘 형편이 되지 못할 때는 목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밤새 문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문지기가 파수를 서도 절도와 강도를 막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살진 양을 잡아먹고자 밤에 슬쩍 담을 넘는 절도와 강도를 막아내는 것은 그들이 밤새 행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목자와 강도의 차이는 정상적으로 문으로 들어가는지, 아니면 담을 넘는 것인지에 있습니다. 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몰래 담을 넘어가면 절도요, 강도입니다.
반면에 목자는 아침이 되면 양 우리로 들어가 양을 몰고 나오기 위해 우리의 문으로 갑니다. 그때 문지기는 우리로 들어가는 하나밖에 없는 문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목자들이 도착하면 목자를 알아보고 우리의 문을 열어주어 참된 목자만을 들여보냈습니다. 2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그래서 양들은 상황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밤중에 우리를 슬쩍 넘어온 절도이며 강도인지, 아니면 아침에 문을 통해 우리에 들어온 자신의 목자인지 말입니다. 절도와 강도의 난입은 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치기 위해 문으로 들어옵니다.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다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해서 목자가 아닐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명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유익을 챙기고자 슬그머니 들어온 절도, 강도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을에서 여러 목자가 공동 우리를 사용하게 되면 아침마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양 무리 속에서 자신의 양 떼를 불러 모아 내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인데 복잡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들에게 그 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어떻게 수많은 양 떼 속에서 자기 양들을 찾아내고 데리고 나아 가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에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면 목자는 양 우리로 들어가 자기가 기르는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3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단순한 집단적 관계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수이기도 하지만 목자와 양의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살펴보고 양의 특징을 보아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목자는 양을 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하나하나 살펴서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때 양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가 자기 목자임을 알고 목자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고 그 소리에 즉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 섞여 있던 양떼 속에서 자신의 양을 불러내고 인도하여 갑니다. 그때 목자는 양을 앞서갑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갔습니다. 4절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가파르고 험악한 지역이 많아서 목자가 먼저 앞서 갔습니다. 양들을 먼저 보냈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앞서가는 순간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러기에 목자이신 예수님이 앞서 가시도록 그분에게 나의 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을 따르는 것은 어두움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의 인도를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삶이란 규칙을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규칙을 가지고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 길에 서 있지 못했습니다. 요즘 이 시대의 리더임을 자임하고 있는 586세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삶이란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도 규칙이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고, 그로 인해 살아 계신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신의 삶의 통치권을 기꺼이 예수님에게 내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5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따라가면 양은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우리를 속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이 보호받는 길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른 달콤한 유혹의 소리들로부터 우리는 돌아서서 즉각적으로 도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혹되면 죽습니다.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매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참 목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4장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 양 떼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됨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목사들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굉장히 크고 잘 생긴 개를 보았습니다. 이 개은 어떤 개냐고 여쭈어보니까 잉글리쉬쉽독이라고 했습니다. 양치기개로 유명한 개입니다. 양들이 허툰데로 가지 않도록 목자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자를 돕는 쉽독은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사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음성만을 듣고 응답하여 그 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음성은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때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생명의 자리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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