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9일 주일예배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첫번째 만남 이야기: 요 20장 19-2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안식 후 첫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하루가 숨 가쁘게 지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전하고, 이어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제자들에게 급하게 달려와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문을 박차고 달려나갈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과 소수의 증언만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상황이 혼란스럽고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소문이 돌고, 유대인들이 사회 혼란 죄로 자기들을 체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제자들은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있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상황을 알아보려고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그저 불안한 마음으로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모여있는 제자들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 계신 겁니다. 분명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인기척도 없이 예수님이 쓰윽 그들 가운데 오셔서 서 계시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난 3일간 제자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자 그들은 도망쳤고, 부인했습니다. 3년간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만해도 이런 비극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두렵고 놀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샬롬, 즉 평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 아래에서 최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다 원만한 상태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인사를 나눌 때는 그와 같은 바램을 기원하는 겁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을 때는 바램이 아닌 참으로 진정한 ‘살롬’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진정 우리 안에 샬롬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샬롬은 하나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샬롬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그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스도를 떠나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 안에 거할 때,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그 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진정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샬롬의 원천이십니다. 거기로부터 우리는 마음에 근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오셔서 샬롬의 인사를 나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상흔을 보여주셨습니다. 20절a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만나고 있는 분이 유령이나 환영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고자 하신 겁니다. 먼저 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손에는 못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통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옷을 들어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드러난 옆구리에는 창자국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행동을 보이신 것은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전 이 장면에서 주님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상흔을 보여주시는 퍼포먼스를 하자 그제야 제자들은 죽음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들을 만나주셨을 때 두 가지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제자들에게 두려움과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을 회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지난 며칠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우울해졌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울함과 슬픔 가득한 그들에게 평강과 함께 기쁨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이것은 극심한 두려움과 슬픔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선물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는, 그래서 예수님 앞에 서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이 넘쳐, 세상과는 분명 다른 삶을 살며, 그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평강도 주시고 기쁨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궁극적 목적은 아닙니다. 사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파송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제자들의 신앙과 헌신과 소망을 새롭게 하셨고, 제자로서의 사명을 각성시켜주셨습니다. 만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사명과 임무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없을 때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계속 수행하기를 기대하시는 겁니다.
그건 두 가지 기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그가 행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행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또한 그는 그의 제자들이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게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파송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권세,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파송은 성령의 원조 없이는 실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세상으로 향하여 나갈 때 우리의 열심을 갖는 것만으로는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고자 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영적 자세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파송과 관련하여 성령의 권능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권능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고 23절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문자적으로 보면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의미인데, 참으로 우리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주어진 걸까요?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습니다.
23절 말씀은 제자들의 죄 사면권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복음 증거에 있어 제자들의 막중한 책임감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 복음을 듣는 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 결과적으로 죄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이에 대해 요일 1:9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기록하였고,
행 2:38도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 증거자가 그 사명을 태만이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복음 증거자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습니다.
겔 33:1-9에서 파수꾼의 직무에 대해 그런 관점에 말씀을 합니다.
8-9절을 보면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제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 이후 찾아온 주님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샬롬이 되었습니다. 슬픔과 우울함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도피자가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주님과 동행합시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평안과 기쁨입니다. 성령과 증인의 권세, 권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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