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온라인예배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막 16장 1-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안식일이 지난 이른 새벽, 어둠을 뚫고 세 명의 여인이 바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바로 사흘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무덤으로 먼저 달려가야 할 이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지만 제자들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려고 무덤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급하게 시신을 무덤에 모시다 보니 제대로 시신을 향품과 기름으로 닦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에 여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낼 수 없어, 귀한 향품을 구해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 분의 주검을 대한다는 생각에 여인들은 매우 우울하고,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을 하려고 할 때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커다란 돌이었습니다. 무덤으로 향하는 내내 여인들은 걱정했습니다. 3절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에 이르러보니 입구를 막았던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여인들이 안식일 전날 무덤을 확인할 때 사람들이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았는데, 막혔던 입구가 열려 있으니, 여인들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여인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매우 놀라게 됩니다. 무덤 속 오른편에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던 겁니다. 무덤 속이 어둑하긴 했어도 그 사람은 분명 예수님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청년이 천상의 존재, 천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여인들은 두려움에 더욱 굳어졌습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6절a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천사의 말대로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여인들조차도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죽은 자의 부활,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불가능함에 처음 대면하는 여인들이었기에 당연히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에 장사 된 예수님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가온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경험과 지식, 그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한 누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천사는 당황해하는 여인들을 향해 놀라운 선포를 하였습니다. 6절b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그가 살아나셨다. 여기 계시지 않는다.”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음에도 여인들은 부활의 소식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듣고도 믿지 못해, 의심하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말합니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안치되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막 15:47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덤을 살펴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정말 여기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더 이상 이곳에 계시지 않아!!! 죽음의 권세가 그를 더 이상 무덤 속에 가두어둘 수 없어!! 보아라! 빈 무덤이지 않니!!! 선포함으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비어있는 무덤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아는 것으로 여인들이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청년은 여인들에게 중요한 미션을 전달합니다. 7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전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살아나신 후에 갈릴리로 가리라 하셨습니다.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놀랄 만한 소식을 듣고 나서 여인들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달려가야 했습니다. 가서 저들에게 부활의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천사의 말에 응답할 겨를도 없이 몹시 놀라 떨며 무덤에서 황급히 빠져나와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마가는 그 여인들이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책임을 위임받았음에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제자들의 역할을 떠맡게 된 여인들이었지만 부활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건 성경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왜 마가는 여인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혀 도망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렸을까요?
물론 끝까지 여인들이 두려워하며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 놀람과 두려움이 가라앉자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뵈오리라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막 16장 9절 이하에서, 또 다른 복음서에서 여인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는 결과대로 말하고 있지만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앞에서 선 제자들과 여인들의 실패를 슬쩍 넘어가지 않고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실은 제자들의 몰이해와 배반이 마가복음 전체에 드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에서도 반복적으로 불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실패, 여인들의 직무유기 등을 낱낱이 밝히고 있는 데는 마가가 분명 의도한 바가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사람의 책임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흐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배반과 직무유기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좌우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제자들의 실패를 통해 오늘도 여전히 믿음과 불신 사이를 오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직면하게 합니다.
분명 실패한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마가는 막 14:28과 16:7의 갈릴리로 먼저 가리라는 언급에서 프로게아이(먼저 가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단순히 갈릴리에 먼저 도착하겠다는 뜻뿐만 아니라 리더십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앞서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과 갈릴리에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그곳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한 운명의 여행을 위해 잠시 중단되었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진척시키는 복음의 사역이 재개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는 말은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신앙이 소문이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과 목격에 의거하였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 속에서 마가의 독자들은 계속해서 제자들을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너희가 거기서 그를 뵈오리라”는 강력한 복음의 요구에 마주해서 독자들은 실패했던 제자직의 현실을 극복하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길이요, 교회의 길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교회의 길, 곧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하여 복음의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와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전체 이야기를 처음부터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어 누구도 굴려낼 수 없는 거대한 돌처럼 보이는 죽음의 권세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메시지는 소망 없는 종말을 끝없는 소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부활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뵈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믿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죽음 너머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엄청난 소식을 들은 여인들처럼 그 부활의 이야기 앞에 서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여인들처럼 두려워서 도망하고 침묵할 것인가?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갈릴리로 갈 것인가? 회피냐 순종이냐의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의 시작 앞에서 두려움으로 주춤하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세계 각처에서 부활절 예배를 “현장예배로 드려야 한다.” “아니다, 온라인예배로 드려야 한다.” 서로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방법적으로 어떻게 할 것 인가도 중요하지만, 본질을 생각할 때 먼저 부활의 주님을 우리들의 삶으로 증거 하는 온전한 예배의 회복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절실한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 앞에선 예루살렘은 본질이 아닌 부차적인 것들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곳 높아진 예루살렘을 떠나 변방의 낮은 갈릴리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부활의 주님을 뵙고, 고난을 넘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바라볼 수 있기에 그 길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좁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서 부활의 주님을 뵈어야 할 갈릴리는 어디일까요? 그 갈릴리를 찾아 부활의 주님을 뵙고 부활의 소망과 강력한 권능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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