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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도마의 의심: 요 20장 24-31절

by 최수근 2020. 5. 5.

2020년 5월 3일 주일예배설교

[도마의 의심: 요 20장 24-3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기원전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아폴로도로스가 쓴 그리스 신화에 보면 헤라클레스가 휘드라의 독이 묻은 옷을 입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다가 독이 살 속으로 파고들자 입고 있던 웃도리를 찢어버리려 했으나 그만 그의 살까지 뜯겨나가는 비참한 처지가 됩니다. 그 상태로 본토로 돌아오지만 결국 그는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불을 붙이게 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합니다. 장작더미가 불타는 동안 한 조각 구름이 헤라클레스 밑을 지나가며 천둥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는 하늘로 들려 올려지고, 불사의 몸이 됩니다.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죠. 물론 헤라클레스는 신화의 인물입니다. 신화이기 때문에 죽었던 자가 불사의 몸이 되기도 하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영웅이 되기도 합니다. 상상 속에서 무슨 이야기이든 마음껏 그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맹랑하다, 터무니없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신화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신화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 아닙니다. 역사적 존재이십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고,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죄인 된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신화 같은 존재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불트만 같은 이들은 부활을 신화적인 요소로 받아들여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역사적인 예수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게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객관적인 증거 결여로 부활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집단적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단정을 합니다. 

실은 제자들도 처음 겪는 상황에서 부활을 대부분 믿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경험상 당연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사람들에게 직접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가는 과정을 복음서 끝에서 그려갑니다. 

한 여인에게 보이시고, 시몬에게 보이시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다락방에 모여있던 여러 제자에게 보여주시는 점진적 과정을 겪으면서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의 믿음은 확고해졌습니다. 그 결과 부활의 소식을 잠재우려고 하는 집단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해진 사도들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이 와중에 잠시 그 흐름에서 소외되었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였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모여있었는데,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는데, 왜 도마는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요? 왜 혼자만 떨어져 나가 있었을까요? 

도마는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 이전 두 차례 잠깐 등장합니다. 11;1614:5에 등장하는 도마를 보면 그는 충성되지만, 자신의 확신에 의거해서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외치다가도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푸념하기도 합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본능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 인생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들을 많이 놓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이라서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혼자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거기에 있지 않아, 한 주간을 더 힘들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심적으로 힘들어도 함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숨지 말아야 합니다. 고립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듭니다. 믿음의 기반을 흔들어놓습니다. 도마와 달리 다른 제자들은 두렵고 불안해서 문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지만, 흩어지지 않고 한자리에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습니다. 굳이 집단이 아니더라도 홀로 서서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실한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불안정한 혼자보다는 신실한 자들의 믿음의 연합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가능성이 더욱 큰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교회 공동체의 예배, 찬양과 기도 모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멀리했고, 소홀히 했던 바로 그 예배, 찬양과 기도 모임이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새롭게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제자들이 기뻐하며 도마를 찾아 만나 말합니다. “도마, 우리가 주님을 뵈었어. 주님이 살아나셨다네.” 하지만 도마의 반응은 처음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과 같았습니다. 아니 한술 더 떴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네.” 도마가 순간 과학수사대원이 되었습니다. 

못자국을 보며,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으며,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도마의 말을 통해 오늘 현대의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고 체험적인 증명을 좋아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증거는 그를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규정하였습니다. 그 규정이 만족 되지 않는 한 결코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런 고집을 부리는 이는 비단 도마뿐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자기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을 들이밉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역사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절대로 믿지 못하게 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일을 기억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스도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부활도 십자가의 충격에 다 함몰되어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도마가 마음속으로 어떤 고통을 경험했는지, 그것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었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다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거절하고 의심하는 도마를 향한 주님의 오심, 이것이 은혜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믿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8일이 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였습니다. 문은 지난번처럼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와서 앉아 있었는지, 며칠 뒤에 슬쩍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왔을 겁니다. 예수님은 처음 부활하신 날 때처럼 문이 닫혀 있는 상황에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순간 도마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놀란 눈으로 예수님을 쳐다보는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a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이건 도마의 이야기 아닙니까? 다른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했는데, 예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으셨는데, 그의 말을 예수님이 다시 반복하고 계시니 도마가 얼마나 놀라워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도마의 고집스럽고 우매했던 행동을 떠오르게 만들어, 예수님 앞에 선 도마는 참으로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마처럼 후회하게 할 어리석은 말은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네가 원하던 바 아니니? 만져 보고 넣어 보고, 그래서 마음껏 확인하고 또 확인해 봐. 그렇게 해서라도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겁니다. 실은 도마가 약간의 안목만 갖추었더라도 그의 주위에는 믿음을 가질만한 근거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심과 싸워 이겨서 부활하신 주를 신뢰하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도마가 실제로 만져보았을까요? 어느 초기 전승에는 도마가 만졌다고 하고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카라바조의 도마의 의심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본문을 보면 도마가 만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도마의 아름다운 신앙고백만 고백 될 뿐입니다.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처음 요한복음 첫머리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해 처음과 마지막을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선포하는 겁니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칭찬하셨던 주님이지만 도마에게는 충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도마가 믿었다면 그를 향해 예수님은 칭찬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직접 보고서야 믿은 도마를 통해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강조하셨습니다. 도마를 비롯해 제자들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거죠. 예수님을 보고서야 제자들은 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 당시 한정된 상황에서 실제 뵌 경험을 통해야만 믿음을 갖게 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 믿음은 계속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1세기 부활의 증인들이 다 죽은 뒤에는 누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뵐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제는 물리적 체험이 아닌 영적 체험입니다. 도마처럼 만져 보고 싶어도 만져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고, 증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 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볼 수 없지만, 말씀을 통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 주님을 보고 믿고 영접하게 되는 것이죠. 

요한 2030, 3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같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에 대한 요청입니다. 

도마의 경험은 믿음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도마를 통해서 보았듯이 믿음은 우리를 흔드는 불신, 의심, 혼란스러움 등과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몸과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이 문제를 홀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소녀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24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의심의 늪에 빠져 믿음이 고갈되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고 계십니까? 의심하던 도마에게는 직접 오셨지만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지난 이 천년 간 수많은 이들이 말씀의 증언 앞에서 믿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도마는 의심을 극복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였고, 전승에 따르면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거기에서 순교했습니다. 의심에서 확신으로의 전환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다른 요인들은 반짝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임을 믿어야 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우리의 삶을 맡기고, 부활의 증인으로 서야 합니다. 그 결과 그 이름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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