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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비움과 채움: 엡 3장 14-19절

by 최수근 2020. 11. 29.

2020년 11월 29일 주일예배

[비움과 채움: 엡 3장 14-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4주간 진행이 되는, 주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4주간의 대림절을 마치고 1225일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대림절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보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는 인간의 측면에서는 그 분의 오심에 대한 기대가 매일매일 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지요. 우리들에게는 축제입니다. 

우리들의 들뜬 마음처럼 오시는 예수님도 그러실까요? 예수님에게는 축제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26-7절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자기 비움의 사건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철저한 자기 비움입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는 일은 그 이전까지 누리고 있던 예수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 세상에 변장하고 내려오는 일이 자주 나옵니다. 여전히 신인데 신이 아닌 것처럼 변장하고 인간세계로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통해 우리를 위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실까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이 땅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채움의 역사가 일어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오심을 통해 우리는 바울처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19b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본래 부요했던 자리에서 실은 너무도 많은 것을 상실한 채 살아왔습니다. 다 주셨는데 감사하지 못하고 더 채워보려고, 하나님께서 최후까지 남겨두셨던 그 하나를 탐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상실 가운데 영원히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통해 새롭게 우리를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인거죠.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움으로 말미암는 채움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자기 비움의 성찰이 요구됩니다. 새로운 것의 채움을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었던 것들을 비워내지 않는 한 새로움으로 충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 안에서도 자기를 비우셨던 주님의 길을 따라 비워내고 새로이 채우는 영적 수행의 작업을 실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에베소서 314-19절의 말씀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위해서는 앞에 절들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a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속사람마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을 헬라철학에서는 둘로 혹은 셋으로 세분화해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성경은 전인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봅니다. 우리는 속사람과 마음을 우리의 자아라는 측면에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믿기 이전에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의 삶을 삽니다. 자기애로 충만하죠.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새로운 질서와 가치체계가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의 부르심은 이런 자아를 비움으로써 시작됩니다. 실은 철저하게 요구됩니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길을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아를 과감히 부수고 나왔을 때만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마가복음 83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어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기 비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으로 채워지기 위해서 요구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자기 비움의 사건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기에 신앙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자기 비움이란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온갖 탐욕과 독선을 비워내는 일입니다. 남을 지배 하고 싶은 욕망,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탐욕을 먼저 비워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정리하여 나누어주고 쫓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 비움이 부재할 때 바로 탐욕과 독선을 통한 자기 채움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죠.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으로 달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이 자기를 점검하여 확장하고 강화하고자 하는 작업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의 핸들을 주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이양하지 않고는 그 어떤 강건함에도, 그 어떤 충만함에도 이를 수 없어서입니다. 좀 강화된 것 같아가가 곧 바로 부러지고, 좀 채운 것 같다가도 다시 몽땅 엎어뜨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죠. 그러기에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고 내 삶을 주님께 진정으로 드리기 위해서는 그런 우리들의 헛된 욕구들을 내려놓고 나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기도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주소서” “주님 저의 마음 가운데 임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다스려주소서그렇게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늘의 채움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속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질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컨트롤 타워의 자리를 주님께 드릴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좌소 가운데 좌정하셔서 우리를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속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고, 그리스도로 채워짐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삶의 열매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로 채워졌는데 그 삶에서 사랑의 열매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그 분의 길을 간다면 당연히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박해의 상황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확장하였던 요인가운데 하나가 사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서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사랑이 일시적이거나 이벤트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이 뿌리를 내리는 토양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 성도들의 삶이 세워지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내주와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졌을 때 가능해질 수 있는 결과입니다. 우리 자아가 삶을 선점하고 있을 때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겁니다. 이타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삶의 근간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미를 더욱 깊이 배우게 되는 거예요. 사랑의 느낌이 더욱 깊어가며 그로 인한 우리의 사랑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상승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중보기도의 그 다음 단계에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광범위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다할 줄 모르는 은혜와 사랑의 풍성함을 탐구해야 합니다. 탐구하면 할수록 깊어지는 그 사랑 앞에서 놀라워하고 감사하게 되는 거죠. 그와 함께 그 분의 사랑이라는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우리가 그 사랑으로 젖어드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를 비우신 주님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죠.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사랑이라는 비움의 행동을 진정으로 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비움을 통해 새로운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층만함은 그분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말씀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자신을 채우는 충만함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완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충만하심까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은 거기까지 우리가 채워지기를 기도하는 기준이며 수준입니다. 그 열망은 이런 것이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라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라는 명령에 암시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갈 4:19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로 새롭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며 약속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충만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면서 그 최종적 충만함을 향해 자라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에덴 동산의 타락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던 인간을 향해 자기를 비우고 오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은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충만함의 은혜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워짐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비우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자신을 비워 그리스도가 내주하시어 새로운 채움의 놀라운 선물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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