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주일예배
[빈 무덤에서 나오라: 마 28장 1-1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1. 성경 속으로
십자가를 지고 지친 몸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여인들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마침내 하늘을 향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여인들은 오열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비통함 속에서 여인들은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깊은 슬픔 가운데 안식일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 미명에 두 여인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며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인들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장사지낼 때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하게 닦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내내 여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따랐던 자들이었기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로 불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날도 두 사람은 골고다언덕으로부터 예수님의 무덤까지 쫓아갔고, 그곳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자기의 새 무덤에 안장하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는 것까지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기에 무덤으로 가는 내내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걱정하였습니다.
두 여인이 마침내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무덤 앞에 경비병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해 하는 순간 여인들의 눈앞에서 엄청난 일들이 펼쳐졌습니다. 갑자기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도 놀라 땅에 주저앉아 있을 때,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도저히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환한 광채를 발하였습니다. 천사는 무덤 앞을 가로 막고 있던 큰 돌을 가볍게 굴려 내고는 그 위에 앉았습니다.
놀란 이들은 이 여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사를 보고 사시나무 떨듯하여 거반 죽은 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사주를 받고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주장할까봐,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던 차에 이런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여인들은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여인들이 지금 찾고 있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 가운데 있는 예수님, 즉 시신을 찾고 있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래서 주검으로 누워계신 예수님을 찾고 있는 걸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2. 세상 속으로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목격한 여인들입니다. 여인들처럼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내가 서 있다면 어땠을까요? 두렵고 떨림으로 무덤 앞에서 주저앉아 있었을까요? 경비병들처럼 죽은 자처럼 되었을까요?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을까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무덤가에 서 있던 여인들처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없음으로 인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 그 이후 펼쳐질 해피엔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라고 불리는 두 여인들과 달리 결과는 미리 알고 있지만, 아직 그 결과를 모른 채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그 여인들보다 얼마나 더 신실한 부활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미 빈 무덤을 확인했으면서도 아직 내 심령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가고자 하는 자기 자신에게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걸까?”라는 공허한 질문을 던지며 부활하신 주님에게로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아무리 크게 외쳐도 우리들 마음에 참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외침이요 종교적인 외침에 불과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반의 신앙일 뿐입니다.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반쪽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지금처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과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고 있지 않아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약한 채로 세상 앞에서 무력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여전히 내 인생 가운데 두려움이 있고, 절망이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이 떠나고 없는 빈 무덤 안에서 고집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새벽같이 달려간 여인이 아니라 죽은 시체를 닦기 위해 달려간 여인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 부활의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까?
3. 성경속의 은혜
천사는 두려워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여주며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수차례 제자들에게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그와 동시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일이 아닙니다. 이미 약속하신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몇 차례 말씀하실 때마다 깊이 새겨듣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신실하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그 신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여인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래 동안 기다려오셨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았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던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이 잠간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활이 예수님의 신성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십자가상의 그의 죽음은 공허한 몸짓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참 인간으로서 깊은 죽음가운데 있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로서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가장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에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천사는 말씀에 대한 확인과 함께 여인들을 부활의 메신저가 되도록 파송하였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처음 여인들은 절망과 좌절, 혼란스러움 가운데 무덤으로 왔습니다. 거기에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은 간데없고,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소리에 또 다시 새로운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혼란스럽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녀들 속엔 새로운 소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예수님이 누워있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없는 “빈 무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과감히 버린 채 한편으로 무서움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큰 기쁨을 가지고 신속하게 무덤을 떠났습니다. 점점 여인들의 발걸음은 빨라졌습니다. 숨이 가빠 올랐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빨리 알리려고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부활의 메신저로 사명을 받고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너무도 기쁜 여인들은 바로 그 자리에 엎드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4. 세상속의 은혜
신앙은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입니다. 깊은 신앙의 세계로 한걸음씩 들어가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빈 무덤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각들이 있습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의 증거로 보지 않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단지 부활의 표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빈 무덤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빈 무덤을 아무리 보아도 소용없습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뒤로 하고, 달려내려 오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방문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 오늘 부활절은 우리에게 어떤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까? 여인들은 예수님이 떠난 빈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 바깥에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빈 무덤에 머물러 있습니까?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 수 없습니다. 감격과 희열이 넘치는 부활신앙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활의 강력한 능력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더 이상 빈무덤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죽음의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염려의 무덤에서, 의심의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빈 무덤 바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처럼“평안하냐!”내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렇게 빈 무덤을 뒤로 하고 영광의 주님을 찬양하며 세상으로 가서 외쳐야 합니다. 부활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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