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주일설교
[서로 사랑함의 절대 기준: 요 13장 34-35절]
최수근 목사
사랑에 대한 담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제입니다. 사랑이 인간의 보편적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위해 전 생애를 걸기도 하고, 어떻게든 쟁취하려고도 합니다.
그와 함께 사랑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욕구를 지니고 있기에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기에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최소한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사회적 삶을 견지하고 타인을 위한 삶을 위해서는 사랑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이며 사회적 존재로서 지켜야 할 의무로서의 사랑을 이스라엘 출애굽 공동체를 향해 그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랑의 기준을 더하셨습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은 대단히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듯이 남들도 사랑하고 배려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 공동체에서 이미 “네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셨기에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새 계명을 주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새 계명을 준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의 사랑과 다른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셨던 것처럼, 지금 제자들에게 레위기의 명령과는 다른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말씀들을 새롭게 조명하시고 그 기준을 파격적으로 높이신 것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의례적으로 지켰던 것들을 넘어서서 다른 차원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써 지켜야 할 새로운 덕목으로서의 제시이기 때문입니다. 마 5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어떤 연유로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레위기 말씀을 넘어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자기애라고 하는 전자의 기준은 사랑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은 사람마다 편차가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느슨하거나 아예 자기애를 상실하고 거의 학대 수준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어서입니다. 그 편차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사랑과 배려의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전혀 사랑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를 오히려 힘들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이 널을 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기준은 절대적입니다. 흔들릴 수 없는 특별한 기준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되 예수님이 본보기를 보이신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최근의 사랑의 행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수련회나 다양한 모임에서 보면 종종 세족식을 합니다. 분위기를 잡기 위해 조명을 낮추고, 음악이 흐릅니다. 전에 아버지 학교에서 섬길 때 남편들이 아내의 발을 씻어주면 거의 눈물바다가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은 단순히 감정적인 이입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단순히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퍼포먼스는 바리새인들도 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종 됨과 희생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게 쉬운 일입니까?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의 길입니다.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가 기준을 잡고 조절이 가능하지만,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조절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입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기준을 요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는 평행을 찾을 수 없는 수준의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카슨(Carson)은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들의 새로운 신분과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요청은 새로운 신분과 경험이 반영된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그런 초청에 따라 우리의 지체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실천 되어질 때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이 시대가 본질적인 사랑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시대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자본주의 병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모든 것, 즉 인간, 사물, 자연을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가치가 화폐 단위로 환산됩니다. 상품의 가치가 우상이 되는 이 시대는 더 이상 본질적인 사랑을 찾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 역시 상품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고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런 시대의 가치가 교회 안에도 흘러들어와 교회를 흐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로서의 교회의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랑의 출발은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 경험함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새 계명의 공동체로서의 출발점은 예수님으로부터 섬김받고, 사랑받은 은혜의 자각이 뚜렷하게 주어졌을 때, 그 사랑의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올 때 비로소 출발됩니다.
그 절대 기준으로서의 예수님 사랑이 인지되지 못할 때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왜 세상 공동체와 기독교 교회공동체가 다르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로 지체를 바라보고 서로 섬기기보다는 이 시대의 가치에 따라 교회공동체가 움직여 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의도적으로 생성될 수 없습니다. 의지를 사용하여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가면을 쓸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우러나려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큰 감동으로 각인될 때 그 사랑이 우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은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계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제자공동체를 향한 새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돌보고 헌신하는 모습은 날카로운 사회적 구별을 그 특징으로 했던 로마 세계에 있어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시대의 가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헌신하셨듯이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분 관계나 상대방의 어떤 매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발을 씻어 주신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는 사랑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생명교회는 새계명을 받은 공동체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택함을 통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 15:16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말씀 했습니다. 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있어 예수님의 사랑의 기치를 높이들고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눈으로 온 열방을 바라볼 수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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