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31일 주일설교동영상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 4장 19-2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의 예배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의 공적인 통로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처럼 열성적으로 예배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일예배, 주일저녁예배,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특별예배 등 정말 열심히 모여서 예배드렸습니다. 전쟁 중에도, 천재지변 시에도 예배당은 활짝 열려 예배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는 방역단계에 따라 10-20%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다가 다시 전적인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박해 상황에서도 목숨걸고 예배하였던 교회가 지금의 상황에서 예배를 어떻게 행하고 예배를 세워갈 수 있을까요? 마음껏 모이려고 하면 집단감염의 어려움이 있고, 온라인 예배로만 드리려니 생소하기만 하고, 그러다보니 실시간 온라인예배가 어려운 어르신들은 기독교 방송들에서 방영하고 있는 교회의 예배에 참여를 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예배가 제한되는 것에 반발이 생기곤 합니다. 전쟁 중에도 박해 중에도 예배가 멈춰진 적이 없는데, 전염병이 예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의 각오로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만 순교하면 문제가 없어요. 예배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었으니까요. 전쟁에서나 박해상황에서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조심하지 못함으로써 가족과 나아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문제가 있어서 그때와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교회 공공성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교계 지도자들과 교인들 중에는 교회의 공공성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정체성이 먼저라고 주장하며 방역을 빌미로 제한된 예배의 회복에 대해서 소리높이는 분들이 있어요.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온라인 예배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포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가정이 아닌 구별된 장소와 형식, 거룩한 예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장소와 형식, 내용을 떠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볼 때는 종교사회학적으로 교회가 예전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예배 회복을 이야기할 때 보면 대부분 방식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은 예배당에 모여 대면 예배로 드려야한다고 주장해요. 그러나 방역의 과정에서 이렇게 주장했던 교회들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고 지난 일년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이들이 76%가 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자니 교회의 공공성이 문제가 되고,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여 온라인 예배로만 드리자니 교회의 정체성이 문제가 됩니다. 답은 밖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배에 대해 많은 분량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에덴 밖에서 생활하면서 터져나온 문제도 실은 예배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시고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예배를 두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은 어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예배를 받으실까가 촛점이 아닙니다. 정성으로 드렸다, 첫 것으로 드렸다, 피의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배의 종결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해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거죠.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호도에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네 감정대로, 네 방식대로가 아닌거예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예배공동체로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게 레위기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 대한 규정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와 함께 예배자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전과 거룩한 삶이 함께 가는 예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기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가나안의 이방 종교적 문화 속에 무방비상태로 들어가면 동화되어버리는 위험성을 갖고 있어서 거룩한 백성이 혼합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장소를 제정하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국에 우상의 제단들을 다 파괴하도록 명령하시면서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신 12장 5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절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절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이렇게까지 하신 것은 가이드라인을 정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우상문화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시고 오직 구별된 장소에서 예배드림으로써 그들의 예배가 지켜지게 하셨던 겁니다. 물론 이것은 그 시대 그들을 지켜주시기 위한 방침이셨지 절대화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그 점을 잘못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직 유일한 예배처를 시온산으로 여겨왔고, 오직 단 하나의 성전만이 그들의 성전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그 성전으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전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계실 것이고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성전과 형식은 이어져 갔지만 그들의 거룩함은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삶이 뒷받침되는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은 원하셨는데, 그들은 보여지는 장소와 형식에 얽매였습니다. 예언서를 보면 그들의 무너진 예배를 힐난하는 내용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으셨어요.
그러한 그들의 맹신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남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이후 성전이 허물어지고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더이상 제사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그간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지역에 회당을 만들어 그곳에 모여 율법을 강론하고 시편을 낭독하며 예배드렸습니다. 포로시대 후에도 이스라엘로 돌아 왔지만 성전과 함께 회당제도가 각 동리마다 보편화하게 되었고, 그런 회당 제도는 나중에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주요한 거점이 되었어요. 예배드릴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들은 회당이라는 제도를 통해 모일 수 있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70년 동안 성전을 떠나 회당에서 모여야만 했던 경험 후에도 여전히 성전중심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귀환을 하면서 스룹바벨이 이끄는 유대 공동체는 성전 재건이 제일 과제였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재건에 동참하려고 했으나 이방민족과 혼합되어 유대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들을 유대인들은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400년경 그들이 거룩한 산이라고 믿었던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성전갈등은 수백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산에서” 하나님이 바르게 예배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두 공동체가 서로 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은 유다가 셀류커스 왕조로부터 독립한 시기인 주전 129년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해버림으로 더욱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안인들은 그리심산 성전이 파괴되었음에도 그 성지에서 여전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던지는 질문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조상 대대로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 데, 왜 굳이 예루살렘에만 예배할 곳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까라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에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에 관한 토론을 통하여 이 물음을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방법이 옳은 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열어주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예배 장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장소에 대한 갈등으로 수백년을 이어왔는데, 그런 그리심산도, 시온산도 아닌 다른 곳에서의 예배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게 도전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한국 땅에서도 예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고 있지만 실은 성경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도 그런 날이 오리라는 말씀을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들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습 2:1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말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더욱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떠나 예배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 드릴 수 없었을 때에 지역에 회당을 만들어 그곳에 작은 그룹으로 모여 율법을 강론하고 시편을 낭독했습니다. 예배드릴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들은 회당이라는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사마리안 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거룩한 산에서의 예배적 전통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교회들이 전통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전통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전통은 필요한 전망과 깊이를 제공해 줄 수 있어요. 반면에 종교적 전통은 우리의 믿음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거의 상관없는 전통들, 그들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소들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위 그런 산들은 단지 하나님 없는 종교를 끌어안을 수 있는 고립된 피난처일 뿐입니다. 그점에서 종교적인 산들은 진리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면서, 철저히 종교적인 사람으로 머물러 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2절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의 부적절성에 대해 논하시면 오늘 그와 같은 자들을 질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하나님은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그런 예배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해오셨습니다. 거기에 무지했을 때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적무지는 사람들을 본질을 외면하게 하고 비본질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두 장소들 모두 곧 용도가 폐기될 것이고, 예배의 내용, 기준이 달라질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예요.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지금까지의 전통적 기준에서 이제는 참되게 예배하는 자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성전을 허무시고 예배의 중심을 바꾸신 것입니다.
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이 단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설명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라 역동적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적인 성품은 우리가 물리적인 방식으로는 하나님과 만족할만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이시기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에게 집중하며 그럼으로써 예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분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죠.
영은 인간의 영이 아닙니다. 성령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높고 깊은 부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입니다. 영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교통의 영이십니다. 이 성령에 의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그 어떤 퍼포먼스를 통해, 그리고 내면의 무정념을 통해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아닌 거죠. 오늘 우리 예배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리되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를 얻습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 예배는 거룩한 장소와 형식에 묶여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그 분과 믿음으로 연합한 가운데 성령에 의해 드리는 예배,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 분의 거룩함에 서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사마리아 인들도 마찬가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의와 장소로 그들의 예배를 치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 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써 다른 차원의 예배로 전환되었습니다. 우리의 의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있어요. 그와 함께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열어주시고, 조명해주실 때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심령 깊숙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심비에 새겨지지 않기에 예배의 자리를 떠나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예배자가 아닌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예배자리와 삶의 자리가 단절되는 불행이 반복되는 것이죠.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그것이 어디에서건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장소”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그들만의 거룩한 장소, 거룩한 전통에 서 있어도 예배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연합되어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각자 처소에서 가족들이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일지라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리라면 바로 그 예배 처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의 자리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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