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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예수, 그 이름의 능력: 행 3장 11-19절

by 최수근 2021. 1. 18.

2021년 1월 17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예수, 그 이름의 능력: 행 3장 11-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하나님께 감히 이름을 물어본 간 큰 인간이 누군지 아십니까?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 묻기를 13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하였어요. 

지금은 그런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구약 시대를 비롯해 옛날에는 이름이 단순히 구별하는 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이름을 지닌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물어오는 모세에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I am who I am” “나는 나다성경 번역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말씀하셨고, 다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후로 구약 성경에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반복적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속에서 언약에 성실하게 임하시는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이 초대교회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오늘 본문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불러내시고 작은 부족을 큰 민족으로 이루어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금 그들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단절 없이 언약이 계승되는 것이죠. 이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 되어진 구원의 경륜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음으로 그 이름의 능력을 누릴 기회를 상실하는 됩니다.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하게 된 직전의 상황을 보면 평생 걷지 못하던 이가 놀랍게도 회복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 앞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가 구걸하는 것을 주목하고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라그가 무엇을 얻을까 기대하고 두 사람을 볼 때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베드로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이 상황이 대단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일어나 걸으라선포하고 환자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어요. 만약 그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에 대한 100%의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미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그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었음을 확실하게 보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기적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힘을 잃었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그는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 기뻐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한달 깁스만 하고 누워있어도 재활치료를 해야 제대로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는데, 평생 앉아만 있어 근육도 다빠지고, 설 수 없던 사람이 재활도 없이 뛰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9-10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이를 본 사람들이 성전 동쪽에 있는 솔로몬 행각으로 재빨리 모여들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 때에나 볼 수 있었던 치유의 기적이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적 앞에서 무척이나 놀라 웅성거리는 무리에 둘러싸인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는 사람들이 놀라서 자신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지적하면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11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베드로는 능력의 근원이 개인의 권능과 경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무리들에게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 영광과 주목을 가로채고 싶은 마음인 것이죠. 한국의 많은 치유 사역자들이 이와 같은 유혹에 노출되어 실족하곤 했습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파고 드리는 이생의 자랑으로 뿌리치기 쉽지 않은 유혹입니다. 

대신에 베드로는 대중의 시선을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도록 합니다. 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베드로의 13절 선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연결되어지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을 구속하기 위한 구세주로 세워주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땅에 새로운 출애굽, 2의 출애굽을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영광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거역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귀담아듣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14-15a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부를 놀랍게 역전시켜서 죽음 가운데서 그를 부활시키셨다고 베드로는 설교합니다. 15b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16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아는 선천적인 장애우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은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했지만, 지금은 부활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된 것임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회복이 예수님의 이름,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예수님의 이름이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말하는 사람,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에 대한 믿음은 이 이름의 주인공, 즉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통하여 작동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 이름 자체의 능력과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능력에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자리할 수 없어요.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셨습니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서 제2의 출애굽,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이름 안에 이미 회복이 있었습니다. 그 회복이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발현된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는 이 약속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이름을 믿느냐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느냐의 선택이 있습니다. 선택을 통해 이름의 능력을 누릴 수 있거나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안에서 일어난 많은 역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은 그 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의 이름 안에는 너무나도 놀라운 약속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약속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의 놀라운 능력으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는데,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의 자기비하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그리스도는 만유의 통치자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이름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에서 출신지를 보여주는 나사렛에 집중하였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서의 이름인 예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이름를 주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에 드러나고 있는 구원의 능력을 보았고,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종, 거룩하고 의로운 이, 생명의 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 그 분의 특성과 사명, 그 분의 계시와 구속 안에서 예수님이 갖고 계신 독특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깨달았기에 믿었고, 그 이름의 능력으로 앉아 일어서지 못하는 자에게 담대하게 선포하였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예수 이름을 거부한 자들을 향해 이제는 끝났다라고 선언하지 않고 베드로는 청중을 향해 회개할 필요성과 회개의 복에 대해 도전함으로 그의 설교를 끝맺습니다. 17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무관심과는 상관없이 이미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오셨습니다. 18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렇다고 이런 백성들의 무지나 그런 무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들이 무지한 백성들을 무죄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한 진실을 접하였다면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회복과 회개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021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 분의 이름을 의지하여 나아갑시다. 날마다 하나님 보좌앞으로 돌아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입읍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온전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씻음받고 새롭게 되어 못 쓰던 다리를 고침 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두 발로, 온전하게 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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