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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유월절 식탁에서 온 세상의 식탁으로: 막 14장 17-25절

by 최수근 2020. 4. 5.

2020년 4월 5일 주일설교문

[유월절 식탁에서 온 세상의 식탁으로: 막 14장 17-25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은 매우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이집트에서 종노릇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잡고, 가족들이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헌데 유월절 만찬은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거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을 나눌 수 있도록 예루살렘의 주택 소유주들은 각 지방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유월절 축제를 위한 장소를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시점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기 원하셨습니다.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고자 하셨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장소와 유월절 만찬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위한 다락방과 식사 준비가 마무리되고, 식사 때가 되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준비된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평소처럼 다 앉아 즐겁게 유월절 식사를 나눌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의 흥을 깨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1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제자들의 반응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즐거웠던 식사의 자리가 순간 경색되었습니다. 놀란 제자들이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주님께 묻습니다.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저마다 주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예수님은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밧새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도록 사주한 다윗에게 그 죄인은 바로, 당신이요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배신자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떡을 먹는 것은 서로 간에 적대적인 마음들을 열어주는 행위입니다. 식사 교제는 평화, 신뢰, 용서, 형제애의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떡을 주었던 사람을 배반한다는 것은 비열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먹는 자”(14:18), “열둘 중에 하나”(14:20a),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사실은 제자들의 마음을 몹시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의 무죄를 증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아니지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제자들, 물론 예수님을 판 사람은 한 사람 유다뿐이지만, 모두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순간 도망치거나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자기가 내뱉었던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말입니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약하디약한 자신들의 속을 깊이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오늘 유독 우리들이 많이 내뱉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니라고만 외쳤지, 여전히 죄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배반하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자리에서 잠깐의 회피가 아니라,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주님의 평가 앞에 진정한 제자라면 다른 대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가 그렇게밖에는 주님을 대하지 못하는군요.” “주님, 우리의 안위를 위해, 내가 살아보겠다고 주님을 팔고 또 파는, 배신하고 또 배신하기를 반복하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어 예수님은 제자에 의해 자신이 팔려 가는 것도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그러나 그 일이 예정된 것이지만 그 일에 역할을 감당한 배신자에게는 혹독한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배신자에게는 돌아설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졌었습니다. 그 길에서 돌아설지 말지의 선택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선택의 책임은 늘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에 회개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배신자의 고지로 가라앉은 분위기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 깊이 내려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시고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식사 때의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다가올 고난과 죽음으로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암울하고 슬픈 일이지만 놀라운 은혜, 그로 인해 누리게 되는 자유와 기쁨이 그 속에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족의 가장은 유월절 식사 때마다 먹는 떡을 취하여 그것을 높이 들고 말합니다. “땅으로부터 떡을 나오게 하시는 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러면 가족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고 나누며,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전달되었습니다. 포도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니라말씀하심으로써 떡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축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신 것은 히브리개념에서 몸은 전인격을 의미하기에 이것은 내 자신이니라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떡을 떼는 일이 그분 자신에게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쪼개진 떡은 예수님의 수난이 단지 고통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유익이 되고 또한 자기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하심을 시연한 비유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이제부턴 더 이상의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늘 양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어 포도주잔을 들어 축사하신 후에 예수님은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잔을 돌려, 다 마신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4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희생제물의 피는 제사장에 의하여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단에 뿌려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포도주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희생 제사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흘리신 피로써 이제는 더 이상의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짐승을 죽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속제물로 자신을 드리시고, 흘리신 피로 인해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었던 옛 언약은 종결되고, 새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248절에 보면 모세가 희생제물의 피를 취하여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희생제물을 통한 언약의 피였습니다. 그것은 속죄를 위해 반복적으로 희생양을 요구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희생 제사는 드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 곧 언약을 체결하는 사건이고 그것은 단번에 드려진 속죄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백성 간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떡과 포도주를 받은 이들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유월절 공동체가 아닌 성만찬 공동체로의 전환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만 이루어지던 유월절 만찬이 아닌, 온 세상으로 나아가 그 식탁의 교제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기만 한다면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말씀하시는 주님 식탁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통해 복음의 소식이 전 세계로 확장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 초대교회의 전승으로 뚜렷하게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유대인들의 매일 식탁에서 대하는 것인데, 이것을 사용하심으로써 앞으로는 주님과 함께 모였던 마지막 밤을 생각하지 않고는 제자들이 다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된 것이죠. 이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식사 때마다 기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믿음의 전승 속에 있기에 우리도 떡과 포도주를 떼며 우리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배신자, 찢기는 몸과 흘리신 피!!! 주님과 함께 하는 만찬의 자리에 즐거움과 기쁨 대신에 슬픔, 우울함, 근심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기쁨의 희미한 빛이 떠올랐습니다.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구원 목적임을 확고하게 믿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리적 죽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로 물든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수님은 홀로 곤경에 맞서서 인간들을 위하여 대속적 죽음을 맞으셨고, 자신의 죽음을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긴밀하게 연결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되돌아보고 이것이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하고, 이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속하셨음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와 함께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있을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언약 백성으로서 새 언약의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그들의 섣부른 판단과는 달리 주 앞에 무릎 꿇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고난받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14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것이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품게 되는 부활 소망입니다. 

그곳 갈릴리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를 사탄은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했지만 고난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옛 언약의 작은 범주를 넘어 온 세상을 향해 새 언약의 문을 활쫙 여셨습니다. 유월절 식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식탁, 온 세상으로 확장된 구원의 식탁을 제공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으로 채워지고 그 분과 동행하는 모든 이들은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도망쳤던 제자들이지만 주님은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고난에 모두 동참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연약하여,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사탄의 꾀임에 마음을 빼앗기는 안타까움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니지요라고 핑계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다시 품으시는 예수님 앞에 오늘도 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먹고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6:55-5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즉 주님과 연합된 삶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그와 함께 죽고, 살고! 고난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모든 은혜는 유월절 식탁에서 유월절 어린양이 아닌 자기 자신을 내어주사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이방인에게로 확장된 식탁으로 초대하기 위한 주님의 희생적인 헌신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은혜와 사랑, 희생과 섬김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믿음의 지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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