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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예배

주간주기(The Weekly Cycle)

by 최수근 2012. 4. 25.

주간주기(The Weekly Cycle)에 대하여- 주님의 날, 안식일

최수근

Ⅰ. 들어가는 말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시간 사용에서 최고로 중요했던 것은 부활신앙과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이런 부활신앙에서 출발하여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시간 주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날(The Lord's Day)을 중심으로 한 “주간주기”(The Weekly Cycle)와 부활절을 중심으로 하는 “연 주기”(The Annual Cycle)이다. 주간주기는 “교회력의 기초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발제에서는 먼저 주간 주기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예배와 모임의 변천과정,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론 주간주기에 어떻게 설교적인 접근을 할 것인지를 다룰 것이다.

Ⅱ. 교회력(The Christian Year)

교회력이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된 우리의 구원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일이다. 교회력은 4세기 말에 거의 완성되었는데, 처음에는 부활절을 전후로 해서 사순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4세기에 이르러 하나님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됨과 관련하여 주현절이 등장했다. 이 주현절이 4세기 말에 성탄절과 나누어지고, 그 후에 마지막으로 대림절이 생겨나게 되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력의 기본은 4세기 말에야 비로소 그 틀을 갖추었다. 이렇게 초대교회 때부터 4세기까지 이루어진 교회력은 초대 교회의 삶과 믿음의 내용을 거의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수난, 죽으심과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력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신학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즉 교회가 교회력을 따라 절기를 지킴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받은바 은혜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교회력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역사를 해마다 되새겨서 우리에게 구원사의 모든 과정을 계속해서 체험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력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 ‘항구적인 은총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피우스 파쉬(Pius Parsch)는 교회력을 가리켜 ‘은총의 교회력’이라 부른다.

우리는 흔히 교회력이라고 하면 부활절, 사순절, 성탄절 등의 연 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절기들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일 년 단위의 교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 년 단위로 지키는 절기들은 훨씬 후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매 주일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처럼, 일 년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한 단위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Ⅲ. 주간주기(The Weekly Cycle)

왜 기독교인들은 일주일을 단위로 모였을까? 예배와 교제를 위해 형제들이 자주 모일 필요성은 느꼈겠지만 꼭 매 칠일 마다 모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성격상 매주일의 예배는 분명히 유대인들의 안식일적 시간 구분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의 주일 신학을 구성하는데 고려되었을 것이다. 주간 주기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을 다룸에 있어서 중요한 날로 살펴보아야 할 날은 주님의 날(The Lord's Day)과 안식일(The Sabbath)이다. 본 장에선 어떻게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예배와 모임의 변천이 이루어졌는지, 주일의 기원과 역사,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A. 주간주기의 역사적 기원

7일을 한 단위로 하는 주(week)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여러 중동 문화의 오래된 유산이라고 본다. 유대인들은 한 주의 마지막 날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의 행위를 기억하는 예배의 때로 여겼다. 그들은 이 날을 “안식일”(The Sabbath)이라고 불렀고, 그 의미는 “일곱 번째”(the seventh)라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2장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창조의 7번째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었다. 그런데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부활 사건 속에서 바로 그 첫 창조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첫 창조세계는 인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결과적으로 창조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였다(고후5:17; 갈6:15). 그러므로 제7일에 회당에 가는 것에 더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20장7절과 고린도전서16장2절에 기록된 대로 한 주일의 첫날에 함께 모여서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주일의 첫날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새 창조가 시작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B. 안식일(The Sabbath)

1. 안식일의 기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거듭되어 왔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그 동안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견해가 있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인의 안식일 제도의 기원이 바빌로니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바벨론 기원설, 7일을 일주로 삼는 관례가 고대의 7혹성의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혹성 기원설, 그리고 그 외에도 만월 기원설, 가나안 정착설, 켄 족속 기원설 등이 있다. 켄 족속 기원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여행하였을 때, 켄(Kenites) 족속의 땅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 족속 가운데 일찍부터 성행하던 토성(Satum)숭배에서 안식일이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던 삶의 자리를 차지했던 안식일 규례가 이상세계나 자연계의 주기 또는 사회적 질서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론은 7이라는 숫자에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divine mandate)에 있다는 것이다.

2. 안식일의 신학적인 의미

할례와 함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표시였던 안식일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a. 쉼의 날(the days of rest)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안식일이 의미하는 것은 “쉼의 날”(the days of rest)이었다. 인간의 명령으로 쉬는 날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으로 쉬는 날이었다. 여기서의 안식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 노예들과 심지어는 모든 육축들에게까지 적용되고 있다.

b. 계약의 표시

무지개가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의 증거였고(창9:1-2, 17),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증거였던 것처럼(창17:11),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증거(출31:13, 17)가 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7:9 이하에 나타나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31:16 이하에 보면 안식일도 아브라함과 주님의 자손들이 지켜야 할 영속적인 언약임을 알 수 있다.

c.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바꿈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시간과 역사의 개념을 바꾸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원시 고대 민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7일을 한 주간으로 계산하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환적인 그리고 신화적인 시간 개념보다는 직선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시간 개념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역사적인 행위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기억되어졌고, 인류존재의 모든 과정에 대한 아주 급진적인 새로운 시각이 이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로서 지켜졌고 또한 구속의 기념일로서도 지켜지게 된 것이다.

d. 종말론적인 의미

안식일은 성취와 완전의 표시였다.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침내 반드시 완전함으로, 샬롬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기대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 마지막 안식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를 향한 구원으로 이해하였다(사56:1-8). 그래서 랍비들은 안식일 준수는 다가올 시대를 대비하는 필수적인 일이며, 인간사에 등장하는 다른 삶의 여정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다가올 세계가 모든 안식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하는 행동이라고 가르친다.

e. 예배의 날

성전이 사라져 버린 상황 속에서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회당의 등장과 함께 예배하는 날이 되었다. 그 결과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의 문화가 생존하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 되었다.

3.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견해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마가복음 2:23-3:6이다. 처음 이야기(막2:23-28)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지나갈 때에 이삭을 주운 사건이다. 두 번째 이야기(막3:1-6)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다. 두 사건을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모두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안식일 쉼의 명령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국 우리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전통에 대한 이런 급진적인 단절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자신을 안식일 명령 위에 놓으셨고 그럼으로 자신을 구원의 최종적인 전달자로서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안식일에 주인”(막2:29)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스라엘의 전통에 대한 이런 급진적인 단절은 은연 중 메시야 되심의 인정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 명령 위에 놓으셨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구원의 최종적인 전달자로서 지명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명령의 종말론적인 약속을 재발견하셨고, 이제 거기에 새로운 차원을 가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세 율법에 나타난 안식일의 근본정신과 원리를 바르게 하셨지만 그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폐지시키지 않았다. 단지 바리새인들의 규정을 무시하신 것이지 구약 율법의 근본정신과 원리에 따라 행하시면서 안식일을 지키셨다.

2세기와 3세기의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유대교의 안식일에 대하여 거의 통일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그나티우스, 순교자 저스틴, 터툴리안 등과 같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안식일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지 못하는 유대교 제도의 하나였음을 한 목소리로 증언하였다. 종교개혁가 루터도 주장하기를 제4계명은 과거 특정한 세대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지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개혁가들이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이지 안식일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안식일 제도를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율법적 제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그리고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고 안식일 제도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Ⅲ. 주님의 날(The Lord's Day)

A. 주일의 기원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는 한동안 구약의 안식일을 그대로 계속 지켜 오고 있었다. 할례가 세례와 병행해서 준수되었듯이(행2:38-41; 21:20) 안식일도 주일과 병행하여 준수되었다. 물론 초대교회는 토요일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와 교제에 힘썼다(행2:46-47).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초대 교인들은 차츰 “안식 후 첫날”을 예배일로 지키기 시작하였다. 안식일이 아니라 매주 첫날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된 드로아 사건보다 약 1년 전인 AD54년경에 기록된 고전 16장2절에 나타나 있다. 이때는 대략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약 24년 후가 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안식일 성수에서 매 주일 첫날 성수로 언제 바뀌었느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추측만이 가능하겠지만, 무엇이 안식일 성수에서 주일성수로 변화시켰느냐에 대해서는 부활사건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유대교의 한 주에서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날”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주의 흐름과 첫날의 기념적인 성격은 기독교에 있어서 시간 개념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첫째 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경이적인 부활사건은 일곱 번째 날 대신에 첫날이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명된 충분한 이유가 되며 그리스도가 제7일에 무덤에 계셨으므로 유대인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무덤 속에 영원히 장사되어 버렸다. 그리고 안식의 완성이 되시며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일곱 번째 날이 아닌 한 주의 첫날을 부각시키셨다. 물론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지키신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였으며 가르치셨으며 안식일에 성경을 읽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부활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주님은 우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는 날까지 모두 열한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으며 그 중 여섯 번은 첫날(주일)에 나타나셨다(마28:7; 눅24:13-33; 요20:11-18; 20:19-23; 20:24-29). 약속된 성령님의 강림도 주의 첫날에 이루어졌고(행2:1-4), 바로 그 주 첫날에 베드로에 의한 최초의 복음 설교가 있었으며 사도 요한은 수년 후의 주일에 인봉된 계시의 말씀을 받았다. 결국 주일은 예수님에 의해서 아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날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주의 첫날의 변화가 사도들의 승인 없이 이루어졌을 리가 없으며 이는 틀림없이 주님 자신의 재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한 주간의 첫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사건과 연결이 되면서부터 “주의 날”(계1:10)이 되었다.

주일에 대한 다른 용어인 ‘일요일’(Sunday)은 2세기 중반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저스틴(Justine Martyr)은 이방인인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의 모습을 바로 알리 기 위해 155년경에 쓴『제일 변증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일요일에 공동으로 모입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하나님께서 어둠과 물질을 변형시켜 이 세상을 창조한 첫째 날이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가 같은 날에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토요일 전 날에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는 토요일 다음 날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 일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나는 그 일을 당신께서 진지하게 고려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당신께 전해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곧 일요일이라는 새로운 이방 용어를 받아들였고,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을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주님의 날이 태양신에게 바쳐진 날이었고, 이처럼 태양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개념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가 큰 숙제였다. 이것을 교회는 말라기4장2절을 통해서 신학적인 정리를 하였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진정한 빛이시다. 다른 하나는 공의로운 해의 떠오름은 구원에 있어서 핵심이다. 이런 신학적인 정리를 통해 자연신인 태양신에게 받쳐진 그 날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경배되어진다는 당혹스러운 사실을 오히려 이점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최고의 태양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은 요한계시록 21장23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와 잘 조화가 되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제롬은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주님의 날, 부활의 날, 그리스도의 날이 우리의 날이다. 만일 이교도들이 이 날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도 쾌히 그 명칭을 택하겠다. 왜냐하면 이 날 이 빛이 떠올랐고 바로 이 날 의의 태양이 비추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을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매주 회상하고 장차 이뤄질 나라를 소망하는 특별한 날로 성별하였다.

B. 주일의 의미

교회력의 기초가 되는 것은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1장10절의 ‘주의 날’로서 매 주간의 첫째 날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한 주간을 칠일로 형성한 고대 이스라엘의 구조를 받아들였다. 1세기 말까지 주의 날이라는 용어는 한 주간의 첫째 날로써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일의 의미가 교회가운데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배드리는 날로서의 주일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에서 매주 첫날이 주의 날이 되자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날에 공동체로 모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주의 날은 노는 날이 아니라 예배하는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매 주일 첫날은 유대인들에게서나 이방인들에게서나 노는 날이 아니라 일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매 주일 첫날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였고 예배하는 공동체 속에서 성찬을 나누었다.

2. 여덟 번째 날로서의 주일

그런데 한 주간의 첫날 역시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종말론의 개념은 승화된 개념으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까지 포함된다. 주일은 이제 “여덟 번째 날(the eight day)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제8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6일간의 사역을 하시고 하루(제7일)을 쉬셨다가 제8일에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새 창조의 개념의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제8일은 세례에 의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할례가 여드레 날에 있었던 것처럼 세례도 정규적으로 이 날에 베풀어지기 시작했다. 흥미 있는 기록은 순교자 저스틴은 노아 홍수에서 여덟 식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여드레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베드로도 노아 홍수에서 여덟 식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세례의 예표로 보았다(벧전3:18-21). 세례와 관련하여 8이라는 숫자에 대한 이 같은 정상적인 해석은 세례반의 모양이 8각으로 되어 있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결국 이제 주일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이 베풀어지는 날이 되었다. 세례는 창조의 새롭게 함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였고,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교회의 종말론적인 결혼 향연을 기대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구속의 성례전적인 상징들, 즉 세례와 성찬을 위하여 함께 모임은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안식일이 그래 왔던 것처럼 쉬는 날로 간주될 수가 없었다. 비록 공동체가 첫날에 쉬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안식일의 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3. 절기로서의 주일

이제 기독교의 주일은 일종의 축일 즉 하나의 절기로도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초창기부터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구약성경에 보면 특정한 날들이 축일들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 날은 “거룩한 날”일 뿐만 아니라 절기이기도 하다. 그 날에 참여하는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이 날들에게는 “거룩한 성회”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그런데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똑같은 어휘가 기독교 주일과 연관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나바서 15장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덟째 날을 경축한다. 이 날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이다.” 이러한 주일에 대한 축일 사상은 터툴리안, 알레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등에서 보여지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초대 교인들은 주일과 유대적 축일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비친 주일은 일종의 절기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테일리(Staley)가 『예배력』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주일, 곧 주님의 날은 교회력에서 나오는 모든 축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초창기부터 지켜왔다.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주마다 기념하는 날이다.”

C. 주일과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

주일의 중심적인 의미를 부활에 둔다면. 잡히시던 밤 주님이 제자들과 나눈 주님의 만찬에서 그 핵심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만찬은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어졌으며 여전히 모든 인류를 위하여 효과가 있는 그 분의 희생에 대한 살아있고도 유효한 징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성육신, 종 되심, 사역, 가르치심, 고난, 희생,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 성만찬은 또한 그의 재림과 그 마지막 왕국을 이곳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만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하도록 하시며, 성만찬 제정 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분명 성만찬의 중심이며 성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은 성만찬 거행에 있어서 근본이 된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을 축하하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으며 모이면 함께 말씀을 듣고 떡을 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는 날이다.

D. 주일의 현재적 의미

일요일은 주의 날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신 날이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포도주를 마신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앞으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며 이들과 교제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우리 일에서 쉬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를 가져야 하고, 축제일처럼 기쁨으로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주일 모두가 그 주간 첫날의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Ⅳ. 설교적 접근

A. 부활의 사건을 선포하는 케리그마적 설교

매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심에 대해서 선포해야 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근원적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의 사건에 놓여 있고 부활의 사건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강단은 그리스도보다는 설교자 자신이나 어떤 철학자의 이름을 통한 윤리적인 설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적인 설교가 되기보다는 “해야 한다”는 식의 율법적인 설교, 명령적인 설교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 케리그마적 설교가 많이 회복되어야 한다.

B.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회복

초대교회의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재현하게 되면 거기에는 말씀 예전과 성만찬 예전의 균형이 어렵지 않게 확인되어진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첫 무리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매 주일 모여 감격스럽게 성찬을 나누면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주일이라고 하면 오직 강단에서 행해지는 설교만이 떠오르기가 쉽다. 그 점에서 한국 개신교회는 보이는 말씀인 성례전을 잃어버렸다.

초대교회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주님의 만찬은 실제적인 식사의 상황에서 행하여졌다. 그리고 이 식사에서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넘쳤다는 점이다(행2:46). 그 점에서 주님의 만찬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으로부터보다는 예수님이 부활 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 함께 식사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본다(눅24:36, 요21:12).

그러므로 성찬식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기쁨”을 가졌던 것은 이 의식이 한편으로는 부활사상과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의 성찬의식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식사와 앞으로 기대되는 종말론적 식사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가 매 주일을 작은 부활주일로 지키면서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지킨 것은 메시아적 식사에서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를 미리 앞당겨 보여 주는 것임과 동시에 부활 이후에 있었던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를 회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성찬식과 예수님의 죽음과의 관련성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었고,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이 지니고 있었던 부활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식사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미래적 도래와의 관련성을 상실되어 버렸다.

한국교회도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의 의미만이 강조됨으로써 성만찬의 분위기가 장례식 분위기처럼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잊어버리고, 주님의 죽으심만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는 잃어버린 성례전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와 더 나아가 성만찬 성례전의 부활과 어린 양 보좌 앞에서 가지게 될 부활공동체의 잔치를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의미로서의 성만찬 성례전의 의미가 회복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C. 주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한국교회는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의 주일성수가 아닌 성도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안식에 동참하게 하는 “참 안식에의 초대”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통하여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첫째, 매주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작은 부활주일이다. 그러므로 이날은 새로운 창조와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날임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 주일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신앙고백으로 예배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를 축복받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율법적인 행위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초점을 두는 복된 예배를 위한 날이 되어야 한다.

셋째, 주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모여 교제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이 날은 구원공동체적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제하면서 기쁨으로 보내는 날이 되어야 한다.

넷째, 주일은 자기의 일을 멈추고 자기 자신의 일을 중단함으로써 나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삶의 자세를 부인하고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신앙고백 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주일은 섬김과 봉사의 날이다. 즉 주일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고서 이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

여섯째, 주일은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날이다. 주일은 태초의 안식을 기념하고 다른 한편으로 종말에 있을 온전한 안식 즉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완성으로서의 새 창조의 때에 있을 진정한 안식을 고대하는 날이다.

D. 은총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 고난, 죽음과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에 대한 메시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회중들에게 계속적으로 주지되어야 할 신앙의 핵심이다. 교회력은 이 신앙의 핵심을 우리에게 극적으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교회력을 따라 성도들의 삶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관계를 맺도록 설교해야 한다. 그래서 회중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체험하며 감사와 감격이 넘쳐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Ⅴ. 결론

일요일(Sunday)은 주님의 날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날이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포도주를 마신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앞으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며 이들과 교제하는 날이다.

기독교는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아브라함 헤셀은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성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하였다. 이 말은 시간보다 공간을 더 많이 강조하는 우리 시대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들을 보면 주일의 가치보다는 교회 건물에 더 많은 것들을 신경 쓰고 그것들을 값어치 있게 생각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헤셀의 생각을 주님의 날로 연장해서 생각해본다면 주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존재됨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매 주일, 주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 날에 우리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다른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이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산다면 우리의 삶은 매우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주님의 날(장철한 최수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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