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주일예배설교원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들 : 창6장1-12절

by 최수근 2014. 3. 9.

2014년3월9일 주일설교문

[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들 : 창6장1-12절 ]

최수근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 주간 한 뉴스매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멍들게 만든 한 사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성직자로서 정직하고도 청렴한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자신이 대표로 재직하고 있던 한 선교단체 출판사의 공금 수억 원을 유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그가 속해 있던 선교단체를 위해 그간 헌신하였던 많은 이들이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교회가 왜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을까?”

교회를 넘어 선교단체까지 죄에게는 소위 성역이란 없습니다. 여기에 서있는 저도 마찬가지이고 앉아 있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작고 크다는 차이일 뿐이지 늘 죄의 유혹 앞에 노출되어 있고, 순간 방심하면 넘어지고 맙니다. 왜 수많은 이들이 죄의 유혹 앞에서 지금까지 고백해왔던 믿음과는 관계없이 맥없이 쓰러지고 마는 걸까요? 참으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처음 아름답게 창조하신 에덴동산으로부터 죄는 쉼 없이 우리들을 공략하려고 넘보고 있습니다.

맨 처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앞으로 인간세계 안에서 벌어질 타락의 총체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인 하와가 선악과를 봤을 때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그녀는 열매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만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룩한 선을 넘어 죄를 범하는 순간도 이와 같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휩싸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망각한 채 유혹을 받아 넘어지고 맙니다.

가인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피를 의지하여야 할 예배를 무너뜨렸습니다. 자기의 공로,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피가 없는, 그 어떤 회개 도 없는 예배는 가인으로 하여금 살인까지 저지르는 후안무치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집요하게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고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많은 타락이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만일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산제사가 드려졌다면, 참 회개의 예배가 드려졌다면, 그 예배에 임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면 그 선교단체의 목사가 수년 동안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그 속에서 참 회개가 일어나지 않고, 주신 말씀이 우리의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에게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가인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을 통해서 세상의 각종 문화가 탄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26-28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문화명령으로 인간들이 세상 가운데 문화를 이루어가게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가인의 타락한 계보를 통해서 먼저 이 일이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세속의 문화 속에 바로 어둠의 권세가 기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타락한 인간들을 통해서 왜곡되게 그 결과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피조물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 하나 둘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이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으로서의 결혼과 돕는 배필로서의 결혼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넘어 인간들의 성적인 탐닉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해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성의 타락이라는 점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저급한 문화 속에 스며들어온 성의 타락함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사회가 몰락해왔습니다. 개인의 삶이 처참하게 무너지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

세상에 타락한 가인의 후예들이 번성해 가고 있을 때에 한편에선 아벨 대신에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신 경건한 씨인 셋을 통해서 믿음의 계보가 이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거룩한 계보를 지켜가고자 애쓰던 그들의 노력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가인의 타락 이후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한 가인의 후예들과 섞이지 않고 오랜 기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고, 점점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그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의 딸들과의 육체적인 교류까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경건한 셋의 후예들이 세상에 나와서 보니까 사람의 딸들, 타락한 가인의 후예의 딸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겁니다. 그만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에 너도 나도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삼기 시작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창세기36절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를 따라 읽으면 62절은 보았다.... 좋았다.... 취했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선택한 결혼이 문제가 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결혼은 정욕을 위한 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한 가정을 세워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기준에 빠져 선택하고 세워진 가정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맑은 물에 검정 잉크 몇 방울만 떨어져도 금방 물은 오염이 되고 말듯이 처음 크지 않았던 죄는 무서운 속도로 확산됩니다. 아무리 거룩하여도 죄가 순식간에 넘어뜨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거룩하지 못한 세상의 딸들과 결혼하면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저들의 삶에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끝내 세속의 문화로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들과 결혼으로 섞이지 말 것을 말씀하곤 하였습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하나님은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의 이방민족의 딸들과는 결혼을 하지 말도록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73-4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경건하지 않은 이들과 섞이게 되면 우리들의 믿음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거센 세상의 파도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왕 솔로몬도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에서 이방의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그 신앙이 무너졌어요. 결국 예루살렘 성 안에 각종 우상들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결혼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결혼뿐만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 성도로서 거룩한 삶의 자리를 떠나 구별됨을 잃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괜찮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숱한 신앙의 위인들도 죄 앞에서 구별됨을 잃어버리고 넘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 만나야 할 사람, 보아야 할 것, 들어야 할 것, 먹어야 할 것 등 우리의 삶의 영역을 구별하고 세속의 오염으로부터, 죄의 오염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남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잘못된 결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물인 자신들의 육체를 방탕함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였고, 그로 인해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그들의 삶의 영역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3a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하나님께선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거룩한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으로서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성적으로 타락하면서 그들의 삶에 거룩함을 상실하고 말았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그들에게서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가치기준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육체적인 우아함과 강건함과 지혜로움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의 추구하는 바는 영원과 신령한 것들이 아니라 찰나적인 쾌락과 외모와 인간적인 명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그들에게 심판이 예고되었습니다. 3b“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하나님은 120년 후에 홍수심판으로 모든 생명을 심판하시고자 작정하신 것입니다. 120년의 유예기간을 주셨어요, 회개하라고, 돌이키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함으로써 더더욱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에 의해 장악당하고, 타락한 인간들 속에는 모든 의도와 계획 속에 선한 것이 자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늘 악한 것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것은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기대하셨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그들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의 외침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1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했습니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과 세상을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주셨건만 이들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망각하고 타락함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6절에서 보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가 온 땅에 넘쳐 남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11-12절의 말씀은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참담한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지만 그와 같은 인간들의 전적인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 나타난 부분입니다. 인류가 진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패의 와중에 무조건적인 신적인 은혜가 들어왔습니다. 전적인 인간들의 타락가운데에서도 구원의 줄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

노아는 그 땅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죄가 가득한 땅에서 은혜를 입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하였습니까?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 반대편에 노아는 꿋꿋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바라보며 성적으로 타락하여 구별됨을 잃어 갈 때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서 있었습니다. 그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자였습니다.

그렇게 세상풍조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고 타락한 세상 가운데 구별되어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에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 의로운 자로, 당대에 완전한 자로 그들과의 교류를 거부한 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노아를 향해 뭐 그렇게 살 필요 있냐고? 적당하게 즐기며 가자고손짓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손짓에 호응하지 않으면 호구가 될 것 갔습니까? 따돌림을 당할 것 같습니까? 손해를 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거룩함을 지킨 우리를 끝내는 웃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비웃음을 받은 노아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부름을 받아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방주를 짓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헌신을 하였습니다. 홍수심판 속에서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언약의 브릿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약의 브릿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거룩함을 지키라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구별됨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빠지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과 벗하여 살아가야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받아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하지만 세상에 속한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옭아매려고 합니다. 특히나 젊은이들에겐 성은 유혹당하기 가장 쉬운 지대입니다. 그 영역을 무너뜨림으로서 다른 모든 영역으로까지 우리를 세속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로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세상의 자녀로 전락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함을 상실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길입니다. 결국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 자녀들의 파멸입니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죄악의 파고 앞에서도 당대에 완전한 자로 서있었던 노아처럼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억센 세상의 유혹과 죄악의 도전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길을 우리들만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자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도록 그리하셨습니다. 자유하게 하셨어요.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러 차례 타락하고, 그릇되고, 변절된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을 때에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지침이 아닌 자신의 욕망, 자신의 요구대로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영적인 지침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무엇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 분과 연합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할 때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거룩함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만으론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연합하여 성령 안에서 하루하루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우리를 사탄은 감히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의 죄를 이기며 온 땅에 죄악이 가득 찬 이곳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함을 잃지 않고 살아감으로써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또한 하나님의 기쁨으로,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 앞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 가운데 생명들을 살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행자입니다. 결코 세상에 섞이지 마십시오. 세상 유혹의 손을 뿌리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