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2월16일 설교문
[ 죄는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한다:창3장7-10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분홍빛 꿈
2004년 10월30일 프랑스 오를리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송을 밟던 중에 한국인 주부 장미정씨가 마약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 일로 장씨는 몇 년간에 걸쳐 옥중 생활을 하며 온갖 고초를 다 겪었어야만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작년에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한 평범한 주부가 남편의 후배에게서 남미 가이아나에서 프랑스로 원석을 운반하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그냥 쉽게 허락한 일인데, 실제로 그 일은 마약운반이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어 다만 얼마라도 벌어서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수락한 행동이 수년간 본인은 물론 가정적으로 가혹한 고통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보기 좋게 우리의 소망,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하는 것의 배후에는 늘 어두운 악의 권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번만 눈 질끈 감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악의 권세는 인간의 이런 욕망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번 물려버리면 악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갑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그들의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보게 될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새롭게 열릴 세계에 대한 굉장한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그 마음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그런 기대가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쉽게 범할 수 있었겠습니까?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기대를 한껏 부풀릴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유혹에 이끌려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약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탄의 달콤함에 속아 늘 죄의 길에 들어서곤 합니다. 감각적인 매력이 우리들의 마음을 마비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이끌려간 뒤 우리에게 남는 건 뭡니까? 후회뿐입니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정말 미쳤나봐?” 이 지긋지긋한 패턴을 사탄은 꿰뚫고 있기에 죄는 늘 우리 곁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벌거벗음을 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뒤 눈이 밝아졌습니다. 7절“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의 눈, 그들의 지성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신적인 개안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보았고, 수치와 치욕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에루밈)을 깨닫고 당황하였습니다. 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자신의 몸을 가렸습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벌거벗고 있었어도 편안했는데, 벗고 있었던 것이 당연했었는데 그만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는 벌거벗은 것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커가면서 어느 시점에선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 벗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지식이 들어가면서 절대로 사람들 앞에 벌거벗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죄는 하나님 앞에서 해맑아야 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그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왜곡시키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을 보게 하고,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보게 하고, 다른 이들의 허물을 보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피하고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둘렀습니다. 그들은 순간 그들의 죄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자신들의 죄를 숨기려고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범죄 한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아무리 자신의 죄과를 가리려 노력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단지 교회에 나가고, 의식과 규례를 지키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선교를 하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허물을 임시방편으로 가리고 있는 무화과 나뭇잎은 아닌지요? 신앙의 구별선을 넘어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여기에 숨어들어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정녕 무화과 나뭇잎은 아닙니까?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죄를 즉시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 고백함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허물을 내려놓지 않고 수없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덮어보았자 그 모든 일은 단지 종교적인 행위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범죄의 결과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 걸까요?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스스로 지혜로움(히브리어 ‘아룸’)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자기들이 ‘벌거벗음’(히브리어 ‘에루밈’)을 알게 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단한 ‘아룸’을 기대하지만 죄의 결과는 ‘에루밈’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간교한 뱀은 이렇게 치명적인 덫을 쳐놓고 이들이 걸려들기를 바랬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담과 하와는 단지 지혜롭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 때문에 뱀의 말에 솔깃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 뒤에 굉장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아담과 하와는 악에 민감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죄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것은 시력이 잘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혹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눈이 열린 결과는 신적인 새로운 지식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 벌거벗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 뿐입니다. 두 사람은 악에 대한 지식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죄에 빠진 자기 자신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던 시선이 자신들의 모습으로 돌려진 결과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우리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생명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우리만을 보게 된다면 부족한 우리의 모습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눈을 통해서 우리를 조명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연약함이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덮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게 은혜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벌거벗은 우리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영적파탄
하지만 허탄한 것들을 바라보고 거기에 이끌리어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수치와 부끄러움, 죄를 깨달은 두 사람에게 다가온 것은 결코 그들이 기대했던 것들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들이 죄를 범한 이들에게 벌어지고 있습니까?
8절“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은 동산에 찾아와 아담과 하와와 교제하곤 하였습니다. 그 시간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두 사람은 귀를 기울이곤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했던 두 사람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자마자 그 분 앞에 무릎 꿇기보다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얼른 숨고 말았습니다. 예전 행동과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죄의 결과에 움찔하여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소리는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 닥쳐온 것은 영적 파탄이었습니다. 죄는 이처럼 영적인 파탄을 초래합니다. 아무리 잘하고 있어도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관계에는 금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숨었습니까? 그들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서 들키고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인간들의 특징입니다. 그 순간만 어떻게 모면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하지만 나무 사이에 숨는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순간을 회피한다고 죄의 심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결코 그와 같은 일은 없습니다. 선택과 함께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적파탄의 위기에 직면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영적파탄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 숨어버린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참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9절“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무너질 때로 무너져 버린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숨어있고자 하는 인간들을 향해 대화를 시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왜 나를 피하여 숨어 있느냐?” 지금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하나님은 확인해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계속 나무 사이에 숨어있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 꿇고 나와야 하겠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심리적 파탄: 수치심과 두려움
하지만 죄로 인해 영적인 관계에 훼손이 가고, 그와 함께 무엇이 우리를 짓누르기 시작할까요? 바로 심리적인 압박입니다. 그 수준이 압박을 넘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심리적인 파탄이 이루어지게 만들어버립니다. 두 사람은 타락하는 순간 영적인 파탄과 함께 심리적인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의 온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담이 대답합니다. 10절“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의 모습을 가지고 정직하게 선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렵거든요.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양심에 화인 맞는다고 하죠. 두려움도 사라지고 간이 배밖에 튀어나와 강심장으로 살아갑니다. 죄를 지어도 그게 죄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처럼 영적순결을 잃은 결과 그들 속에는 수치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수치와 마음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게 됩니다. 죄를 행하여 얻어진 악에 대한 지식은 공포를 가져왔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일단 피하고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주는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갖고 있다면 설령 죄를 지어도 결코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지요? 이렇게 죄로 인해 드러난 수치와 두려움은 관계의 적입니다. 견고하게 보였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진행속도를 보면 인간이 과연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오랫동안 교제를 누렸나 싶을 정도로 급속하게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구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신앙의 일상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에 내가 게을러질 때 사탄은 즉시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공격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과연 한 순간에 넘어졌을까요? 잘하고 있는데 유혹에 빠졌을까요?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과 교제했는데 그 분의 말보다는 뱀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되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틈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994년10월21일 오전7시38분경 성수대교가 무너진 사건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사고로 아침에 등교하던 무학여고생들을 비롯해서 32명의 사망자와 17명의 부상자가 발생을 했습니다. 저도 그 당시 약수동에 있는 신일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라 수시로 성수대교를 넘나들던 시기였습니다. 저도 성수대교를 건널 때 마다 다리가 몹시 출렁인다고 느꼈습니다. 튼튼한 이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을까요? 아닙니다. 오랫동안 상판철골구조에 피로도가 더해졌던 겁니다. 그 증상이 드러나서 시민들이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넘어갔던 것입니다. 다리가 무너지고서야 그 책임을 지고 총리와 서울시장이 경질되었지만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령 안에서 날마다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하지만 그 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상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내가 못 찾더라도 옆에서 찾아주면 그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임시방편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너져 내립니다.
지금 단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나의 허물, 나의 수치, 나의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참 구원의 기쁨을 누리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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