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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내 탓입니다 : 창3장11-21절

by 최수근 2014. 2. 24.

2014년2월23일 주일설교문

[ 내 탓입니다 : 창3장11-2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네 탓이다!

지난 며칠 사이 이집트와 경주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슬픔을 당한 희생자들의 유족들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위로는커녕 악의적인 반응들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폭탄 테러 같은 경우 뭐 그렇게 위험한데 갔느냐?’ ‘기독교인들이 너무 이슬람 사람들이 싫어할만한 행동을 한 거 아니냐?’ ‘그래서 표적이 되었다.’는 등 모든 책임이 피해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들을 합니다. 이것이 왜 이들의 잘못입니까? 너무도 쉽게네 탓이야!” “당신이 잘못한 거야하는 소리에 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다치곤 하였습니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은 인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분위기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로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연일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국가에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어떻게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야 국회의원들, 국가공무원들, 기업가들, 노조들 서로 지금도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서로 네 탓이라고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좀 시원하게 내 탓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말하는 게 그리 어려운걸까요? 우리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해 놓고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꽉 막힌 사회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오래 전에 김수환 추기경 시절 천주교를 중심으로 내 탓이오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그마한 실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우리 사회 분위기가 참 많이 달라지리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렇지만 잠깐 그 때 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이게 본래 타락으로 인해 드러난 인간의 왜곡된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이 견고한 진이 참 질기게도 오랫동안 우리들 속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네가 먹었느냐?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두른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황급히 나무 사이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네가 어디 있느냐?”찾으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여기에서 제일 먼저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에게 묻지 않으시고 열매를 받아먹은 아담에게 물으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창세기 216-17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하여서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맺은 주체는 아담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분명 들려주셨는데 그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지켜지지 않으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으시겠습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던지신 질문을 보면 누가 그 열매를 따먹었느냐 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담 네가 열매를 먹었느냐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아담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다른 이유 둘러대지 말고 내 제가 먹었습니다.”고백하면 됩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용서를 빌어야지요.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경험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핑계부터 나올 때가 많습니다. 이러면 죄의 문제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관계적 파탄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아담의 대답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습니다.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자신이 먹었다고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아담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그 책임을 여자에게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이 대답은 하나님과 하와, 양쪽과의 관계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이기는 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처음부터 죄의 유혹을 차단하는 게 최선책입니다. 하지만 그 선이 무너지면 즉시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토스하여 넘겨버림으로 구차하게 남을 붙잡고 늘어지면 우리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책임전가는 우리에게서 관계적인 파탄을 야기 시킵니다.

아담은 여자를 칭할 때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라고 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좀 뼈가 있는 말이죠? ‘하나님은 왜 이런 여자, 유혹에 잘 빠지는 여자를 나에게 주셔서 나로 하여금 곤란하게 하셨을까요?’라는 억울함이 배어 있습니다. “당신이 주신 여자가 나에게 열매를 주어 나도 먹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결코 기대하신 고백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서 급기야 부부 사이에 신뢰마저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와를 향해 이는 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외쳤던 아담의 환호성은 사라지고 여자를 향한 원망만 남아버렸습니다. 만일 여기에서 아담이 제가 죽일 놈입니다. 아내를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회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정이 1/3씩이나 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할 뿐이지 자신이 먼저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구차한 변명을 들으신 하나님이 이제 여자에게 물으셨습니다. 13a“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이 질문 역시 여자의 책임을 추궁하는 물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창부수라고 여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뱀에게 그 책임을 떠 넘겨버렸습니다. 13b“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은 여자에게도 물으실 때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나를 유혹해서 넘어갔다는 것은 죄의 원인이 아닙니다. 그건 단지 우리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될 뿐이지 우리 안에 이미 그와 같은 행동을 위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도록 만든 내 안에 탐욕적인 것들을 고백하도록 하신 것이지, 다른 이유를 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우리들은 속마음을 숨기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우리의 마음 중심의 탐욕, 그 죄성을 보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마음, 하나님을 넘어서려고 했던 욕심, 이와 같은 그들의 근본적인 죄의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걸 토설해야만 우리가 살아납니다.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들은 충분히 취소될 수도 있었을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18절에서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두 사람이 즉시 죽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말씀하신 징벌이 미루어지고 하나님의 심문이 이어졌다는 것은 범죄 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른 계획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어리석게도 책임을 회피하다가 은혜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무릎 꿇지 않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벌을 받는 일뿐입니다. 이들이 받을 벌은 불행하게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깊은 사귐의 관계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타인에게서 그리고 자신에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게 만듭니다.

 

뱀에 대한 심판

그런데 지금까지 남자와 여자를 심문하신 하나님께서 남자나 여자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식의 질문을 뱀에게는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대화도 심문도 다 생략하셨습니다. 뱀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벌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뱀은 악의 진원지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반역한 악의 세력 안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어떤 가능성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파트너로 창조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였기에 구속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의 죄를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뱀을 향한 심판은 두 가지의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뱀이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배로 다녀야 할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흙을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교한 뱀이 벌을 받아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낮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과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먹게 됩니까? 죽음을 먹게 될 것입니다. 가장 비천한 자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속히 이와 같은 뱀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급받아야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문자적으로 뱀을 혐오하는 인간들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저도 어렸을 적에 동네아이들과 놀다가 뱀이 숲에서 기어 나오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뱀의 머리를 향해 짱돌을 던졌습니다. 짱돌에 맞아 뱀의 머리가 깨져 죽으면 나무에 전리품처럼 걸어놓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보다 깊은 의미는 악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거룩한 사람들 사이에 영적인 싸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싸움은 사탄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우리는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최초로 인간 세상에 들려주시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마침내 승리케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지만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유혹을 이기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승리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에 대한 심판

이처럼 뱀에게 벌을 내리신 하나님은 바로 이어 여자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에게 주어진 벌은 여자가 어머니로서 받을 고통과 아내로서 받을 고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어머니로서 임신과 해산의 고통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육 번성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할 생명을 낳는 일에 죄로 인해 고통이 수반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참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가 버립니다.

 

남자에 대한 심판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벌은 남자가 관리해야 할 땅에 대한 저주와 남자에게 대한 처벌로 이루어졌습니다.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사람을 만들 때 재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으로 주어진 아름다운 땅이 인간의 범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한 곳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풍성한 열매를 베풀던 땅이 인간의 수고와 노동이 가해져야만 비로소 식물을 내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자연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습니다. 좀 불공평한 처사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건 처음부터 자연은 인간과 공동운명체를 이루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남자는 평생토록 수고와 고생의 땀을 흘려야 땅에서 난 것을 먹을 수 있는 벌을 받습니다. 범죄 하기 전 에덴동산에서 기쁘고 즐거웠던 노동이 먹고 살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만물을 가꾸고 지켜야 할 신성한 노동이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세속적인 노동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로 수많은 이들이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에덴에선 만성피로란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이름

하지만 가장 무서운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애초에 약속된 대로 죽음의 형벌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창세기319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그와 함께 이들을 위하여 지어주신 삶의 터전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 추방으로 이들은 언약의 특권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처럼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 그들은 철저하게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살기 위해 노동의 수고를 감내해야 했고, 해산의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보살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격리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창세기3장은 인간이 그의 사는 날 동안 수고하며 괴로워하고 결국에는 왜 죽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구별선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인해 인류는 현재 악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죽 옷

참으로 다행스러운 사실은 하나님이 죄 지은 아담을 매몰차게 심판가운데로만 몰고 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내 탓입니다말하지 못하고 네 탓이야라고 외치는 불쌍한 인간들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부부가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직접 해주셨습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무화과나무로 엮은 옷 대신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힌다는 것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서 그들이 생명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후에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들의 희망이고, 복음의 시작입니다. 인간은 동산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간에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쫓겨나가긴 했지만 그 연결점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인 가죽옷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통해서 여전히 하나님은 추방당한 인간에게서 손을 놓지 않으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줄을 놓은 인간들은 영원토록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으며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아담과 하와이기를 고집함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우린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 아래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줄을 놓지 않고 붙잡고 가는 이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서내 탓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로 인한 우리의 부끄러움이 덮여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엔 프로이드 이래 자신의 어떤 불행이나 실패를 잘못된 아동기 탓으로 돌리는 일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자아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리학자 펄스는 개인적인 책임에 대해 분명하게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는 나의 문제입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고백합시다. “내 탓입니다!”그렇게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부끄러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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