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0일
[교회여,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히 13장 9-16절]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이자 예수생명교회 창립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의미 있는 날에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됨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갱신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505년이 된 시점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지금 교회가 교회 됨을 지켜가고 교인이 교인 됨을 지켜가기가 여간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진리가 부정되고 신적 권위가 부인 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교회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생명이시고 구원이심을 외치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예수생명교회입니다. 지난 11년 우리는 교회의 기초를 다져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머릿돌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계속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서 온전하게 세워지기를 꿈꿔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데, 예수님은 어떤 교회를 원하실까요? 지금과 같은 교회를 꿈꾸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이렇게 대형교회로부터 작은 교회, 가정 교회까지 다양할 것이라곤 아셨을 겁니다. 우리 주님이 보실 때 교회의 크고 작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걸로 유추해보면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떤 중심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리스도인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중심을 갖고 있는가가 판단 기준이 됩니다. 그 중심에 어떤 가치를 보실까요?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셨어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곳을 성문 밖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성문 밖 골고다 언덕입니다. 성문 안과 밖은 그 차이가 큽니다. 옛날 성안은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지만, 성문 밖은 보호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히 13장 13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영문 밖 주님에게로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바로 그 길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짐으로써 시작됩니다. 이것이 진정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있을 때, 영문 밖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박해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영문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국교로 인정받고 영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교회는 급격하게 무너졌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커 갔지만 내면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4세기에 나일강 주변으로 많은 수도승들이 몰려왔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도원도 영문 밖에서 영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급격하게 몰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영문 안의 안락함과 풍성함에 쉽게 속습니다. 대부분 영문 안의 것들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본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속아 넘어갈 때 그 중심은 주님의 은혜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냥 썩어질 것들도 채워지는 겁니다.
이 땅의 것들은 변하고,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문 안에 있으면 이 실재를 볼 수 없습니다. 영문 밖으로 나갈 때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영구한 도성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14절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우리의 비전은 결코 흔들림이 없는, 요동치지 않는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건설하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교훈들도, 진리라고 외치는 시대사조들도, 이 땅의 안락함도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문 안에서 쌓아가는 것들은 바벨탑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문 밖으로 나아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 나라는 결코 무너질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전하는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삶을 살고, 그와 함께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도록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오직 신앙적인 일에만 관여해야 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전문적인 기독교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고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7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땅의 것들에 마음을 두게 되고, 결국 하늘의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고, 영적인 혜택을 누리도록 하셨지만, 이 땅에 흔들리는 것들, 무너질 것들을 붙잡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의 제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고, 우리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기를 하나님은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섬김과 나눔의 길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요, 최고의 제사가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러 다른 교훈들이 판치고 있는, 어찌 보면 기독교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전도하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고,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계명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으로 나간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것은 이전 삶의 방식들을 완전히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삶으로 드리는 제사이고, 이 산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믿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참 제자라면 근심과 걱정이 아니라 담대함과 기쁨으로 영문을 나서야 합니다. 내가 구축하고자 하는 영문 안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다른 것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무엇을 말하든 진실과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문 안에서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잘못된 도성에 정착하려 한다고 질책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문 밖에 서 계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분 앞으로 나아갑시다. 거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는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암울한 세상에 우리가 빛이 되고 소망이 됩시다. 이 일에 함께합시다. 주님이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교회를 세워가는 길에 힘을 합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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