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6일 주일예배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다: 마 8장 1-17절]
인격적 관계가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 일은 관계에 진심일 때 가능한데 쉬운 것은 또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이 어려움이 우리 신앙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인격적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관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우상숭배처럼 신앙생활 한다는 말입니다. 필요하면 가서 비나이다 외치고 그 앞을 떠나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서기관들과는 다른 권위를 느낀 많은 이들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문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거죠. 이들은 기적과 능력을 보고자 했지,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와 주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대단한 기적적인 사건과 현상만 보려고 한다면 대부분 그것에 대해 놀라움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보고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와 주님 앞에 서는 자만이 관객이 아닌 예수님의 뒤를 진정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났다면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제자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다양한 이적 기사들을 기록하면서, 그런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 주님 앞에 서서 치유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적적인 현상만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 가운데 있기를 고집한다면 그에게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 것뿐입니다.
첫 번째 다가온 이는 나병에 걸린 한 유대인 남자입니다. 마 8:1-4.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병이었습니다. 병을 치료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고, 나병은 사람들을 부정하게 한다고 하여, 나병 환자들은 회당 예배와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습니다. 레위기 13장 46절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그런 나병환자가 격리의 원칙을 어기고 사람들 틈에 들어왔습니다. 돌팔매질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예수님께 나와 간청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간청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불결한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는 순간 나병환자는 물론 제자들과 사람들이 다 놀랐을 겁니다. 정결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변의 분위기를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많은 사람이 볼 수 없었을 때 인간관계와 회당 예배에서 소외당한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았고, 그것을 믿고 그 앞에 나왔고, 그분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간절함도 있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에서 그는 주님이 분명 치유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음을 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 다가온 이는 이방인 백부장이었습니다. 마 8:5-13.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하였습니다.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실제로 예수님은 사역 내내 이스라엘에 집중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치유는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말씀을 다르게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쳐 주리라”는 헬라어 단어 ‘데라퓨소’를 미래 서술문이 아닌 의문문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말씀은 “내가 가서 고쳐주어야 하느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문장을 본다면 순간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수로보니게 여인 때처럼 시험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매우 놀라운 말을 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리 말씀하시자 중풍을 앓고 있던 하인이 즉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믿음의 통찰력을 보여준 백부장을 극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의 믿음은 단지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담대한 믿음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예고합니다.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분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마태의 의도입니다.
백부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삶 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소망하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엄청난 격려가 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선포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능력이 나타나고, 치유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마 8:14-15.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은 심한 열병에 걸려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보시고, 그녀의 손을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단지 그녀의 손을 만지시기만 했는데도 열병이 나았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요구도, 믿음에 대한 언급도, 예수님 자신의 말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행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복음의 사건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솔직히 자격조차 없지만 죽어가는 우리를 향해 먼저 손을 뻗으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불시로 다가온 예수님의 은혜로 열병이 나은 여인은 그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할 일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의 도식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보는 순간 그분의 뒤를 따르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직 예수님을 못 본 것입니다. 계속 비인격적 관계로 머문다는 것은 주님을 보지 못한 거죠.
예수님의 치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날이 저물었어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다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는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17절에서 증언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를 이사야 53장 4절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가 쉬지 않고 치유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프고 고통당하는 이 땅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치유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치유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신비입니다. 이 은혜에 직면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문둥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백했던 것처럼 백부장이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고백했던 것처럼 그분 앞에서 간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여러분의 믿음을 어떻게 고백하며 나가시겠습니까? 나병환자의 갈급함과 백부장의 확신과 베드로 장모의 섬김으로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가 입술을 열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원자로 믿고 고백할 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해왔던 것처럼 놀라운 회복과 치유, 구원의 역사가 동일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인생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이방인 백부장이 그의 믿음으로 자신을 종을 살렸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또 다른 한 사람을 살리게 될 것입니다.
거대한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로 나간 자들은 그제나 지금이나 소수입니다. 군중은 소리 없이 사라질 뿐입니다. 그러나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 이들은 그분과 함께 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주되심 앞에 무릎 꿇으십시오. 순종하십시오.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주님과 인격적 관계 안에서 만나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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