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3일 주일설교동영상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가복음 6장 45-5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충분히 먹은 군중들이 흩어지기 전에 배를 타고 벳새다로 건너가도록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엄청난 일 앞에서 제자들과 무리가 얼마나 들 떠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틈을 주시지 않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 태워 보내시고, 이어 무리와 작별하신 후에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등 떠밀리다시피 배를 탄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쉽게 가지 못하고 역풍과 싸우면서 호된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들은 수 시간 노를 저었음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불어 재끼는 바람과 싸우며 호수 한가운데서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자 가운데 어부 출신들이 많았어도, 오랜 시간 역풍에 맞서 노를 졌다 보니 지쳤고, 서서히 그들에겐 두려운 마음도 밀려왔을 것입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가는 뱃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가라고 하셔서 순종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역풍을 만나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은혜를 경험한 이후에 곧바로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은혜와 위기!!! 이 두 가지 사건이 우리 삶 가운데 교차합니다. 은혜의 시기에는 우리가 앞으로 잘 나갈 수 있습니다. 헌데 풍랑이 이는 시기에 우리는 그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힘들어하곤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역경을 당하여 애써 노를 저으면서 고통을 받는 제자들의 관점에서 오늘 우리들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하여 노를 젓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힘들고 지쳐갔습니다. 뚫고 나갈 수 없는 풍랑에 맞서면서 서서히 낙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우리나라의 상황이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계속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보건당국이 애를 쓰고 있지만 확진자 수는 급격하게 늘어가고, 급기야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각종 뉴스를 틀어 보면 전국의 방역체계가 뚫렸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거짓 뉴스들이 넘쳐나고, 코로나 19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들의 삶을 위축시켜 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요 며칠 사이 신천지와 관련하여 난무하는 소문 때문에 교회마다 오늘 주일예배와 다음 주일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저의 친구목회자 단톡에도 신천지를 대처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올라왔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지혜를 모으고, 우리가 해야 할 수 있는 것들은 찾아서 노력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스, 메르스, 지금의 코로나19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숱한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중세에는 페스트로 인해 심지어 수천만 명, 아니 수억 명이 죽기도 했지만, 엄청난 고난의 시간들은 지나갔습니다. 삶에 소망을 품고 사투를 벌인 이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각자가 전염병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슬기로운 위생 생활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한다면, 제자들의 힘겨운 상황을 보시고 그들에게 오신, 그래서 그 위기로부터 구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과 맞서 힘겹게 노 젖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로 밤 사경 되는 새벽 3시에서 6시 즈음에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옆을 지나쳐 가셨습니다. 위기에 신속 대응하셔서 오셨는데 그들을 그냥 지나치셨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제자들을 시험하신 걸까요? 아니면 정말 지나쳐 가시려고 했을까요?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제자들을 지나쳐 가시려는 데는 예수님의 의도하신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구약에 여러 장면에서 하나님은 선택된 한 개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모세(출 33:19-23;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와 엘리야(왕상 19: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에게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자기를 계시하신 것처럼 지금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지나가심으로 자신의 신적 위엄과 권능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8절에서 지나가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파레르코마이”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연관될 때 신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지나가시기를 원하실 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초월적 위엄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나 초인적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분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풍랑 속에서도 그들을 능히 건질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그들이 순간 깨달았다면 그들은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초월적 위엄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환영, 즉 유령만을 보았습니다. 49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물결과 바람이 아니라 물 위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을 오히려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와 두려워하지 말라 사이에 “내니”라고 하셨습니다. 에고 에이미, I am은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하시는 공식 문구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도 풍랑으로 제자들이 위기를 겪었을 때 풍랑을 말씀으로 명하여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도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막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그리고 얼마 뒤에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고, 그런 그들을 향해 “에고 에이미, 나이니라” 말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고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풍랑을 잠재우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 신적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51절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그의 단순한 임재가 몰아치는 바람을 그치게 하고, 제자들이 계속 항해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깨닫지 못했고 놀라움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52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제자들은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던 예수님에 관해서 깨닫지 못했고, 도리어 마음이 둔감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바라보지 못한 사건은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의 산상변모사건까지 이어집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셨지만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막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렇게 말한 이유를 6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이런 제자들의 두려움과 이해의 결핍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 풍성한 선물,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셨지만, 우리가 때로 너무 우둔하여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현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두려움, 영적 무지함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걱정하며,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제자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는 그들의 곤고함을 아시고, 바다 가운데서 고생하고 있던 밤에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두려워 뒤로 물러설 때도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안전하게 항구에 도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거센 풍랑같이 몰아치는 혼돈의 시기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볼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너무나 눈이 어둡고 그것을 바라보기에 너무나 무디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낙심과 큰 두려움의 시기에 그리스도가 사랑과 능력을 보이시면서 고난의 물결을 가로질러 우리를 인도해 가고 계신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간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또한 지나 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끔찍한 시기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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