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9일 주일예배(온라인)
[그리스도의 섬김을 따라: 마 20장 20-2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켐피스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유혹 한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악은 계속하여 그대에게 높은 것과 영예를 추구하라고 유혹하고 있다.”
이 유혹은 엄청난 정치 권력, 세상의 구조 속에서 저 높이 있는 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 벌어지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유혹을 받습니다. 소위 도토리 키재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고만고만한 자리에서 우리는 이런 갈등 속에 첨예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조정하려고 하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면 분통이 터지고, 속상하고, 조금 대접받으면 우쭐해지고, 기분 좋고 그렇습니다. 이런 불편함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섬김보다는 대접받고 높아지고자 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서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전혀 다른 가치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서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두 도성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여전히 세속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충 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비움이어야 하는데 채움을 고집합니다. 이타적이어야 하는데 이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셔야 하는데 자기 다 받습니다. 그로 인해 자기기만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제자들은 더했겠지요.
마태복음 20장 17-19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를 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권력자가 죽고자 합니까? 고난받고자 합니까? 자기의 권력으로 지배하려고 할 뿐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이 길 끝에서 수난받고 죽으실 것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 숙연해져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이 실현하실 왕국에서 자신들을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입니다.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인척 관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촌지간으로서의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특별한 대접 받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데서 드러난 것처럼 공로에 대한, 즉 개국공신으로서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안에서 성취, 공로는 매우 제거하기 어려운 뿌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렇게 주님을 따랐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한 우리의 길은 끊임 없이 왜곡된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주님을 결코 뵐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청탁은 어머니 살로메가 했지만, 직접 야고보와 요한에게 묻습니다. 먼저 22절 첫머리에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앉고자 하는 자리가 진정 어떤 자리인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셨어요. 그 자리는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이 영광의 자리, 통치의 자리, 높아짐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리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는 그들의 무지함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위대함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의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기대가 있으십니다. 거기에 영적인 조율을 이루어가며 한 걸음씩 나갈 때, 하나님의 기대가 나의 기대가 되어지고 그 분 앞에 그렇게 설 때 우리는 진정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의 기대로 나아가다보면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게 폭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대와 제자들의 기대가 그렇게 다른 목표점을 향해 평행선을 그려오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잔이라도 마실 각오가 되어 있겠지요. 그것이 고난의 잔이요, 순교의 잔이라도 말입니다. 권력이 주어 진다면 인간은 그 어떤 일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로와 보상에 있어서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0장 1-16절에서 포도원 일꾼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일한 품삯을 정하고 그것을 주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조금 더 일했으니 늦게 온 사람보다 많이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너무도 많은 영역에서 피곤한 것 아닙니까? 잘못된 기대를 갖고 살아가니 그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23절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도 그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순교했고, 요한은 말년에 유배를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좌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는 권리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권리를 은연중에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통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아마도 제자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도리에 어긋나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두 사람이 자신들만 종말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얻으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친척 관계를 이용해 어머니까지 내세워 예수님께서 종말에 세울 것으로 생각한 나라에서 중직을 청탁한 두 제자의 정치적 야심에 찬 행위에 대하여 열 제자들은 자신들은 이렇듯 질투를 동반한 격한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약아빠진 두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느낌이겠죠.
하지만 열 제자의 반응 역시 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세워지게 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제자들의 가치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함께 불러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은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모르므로 억압과 무력을 통하여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세상적인 통치 원리에 입각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을 예로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26-27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바른 질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종종 오해합니다. 크고자 하면 섬겨야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포커스는 앞에 것이 아니라 뒤에 것입니다. 섬겨야 한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섬겼으니까, 내가 종이 되었으니까 라는 생각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섬김이 아닌 우리의 삶 자체가 섬김이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섬김이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목적이 달성되면 섬김은 멈추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총선에서 그런 이기적인 모습들을 수없이 보았잖습니까? 평생 섬길 것처럼 허리숙이고 무릎 꿇다가도 당선되면 지배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는 인생들 말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수많은 권력들이 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이 예수님을 못 받았던 것처럼,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또다시 못 박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를 통한 섬김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심을 통해 섬기는 것입니다. 그 섬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 섬김의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나누어 갖기 이전에 자기를 내어 주는 그의 사랑과 섬김, 그리고 고난이라는 최종적 운명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 으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 가운데 우리 예수님이 초청하십니다. 함께 이 가치의 삶을 살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다움을 세워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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