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0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벧전 1장 3-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얼마 전 시사프로에서 관광버스 기사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텅 비어 있어야 할 주차장에 수십 대의 버스들이 그냥 서 있었습니다. 인터뷰하는 내내 걱정만 하시다가 “이 기간이 길어지면 안 되는데, 너무 힘든데” 눈물을 펑펑 흘리시는 거예요.
삶이 무너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신 것 같아요.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이 고통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요? 멈출 것 같다가도 다시 이어지고, 전혀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에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것이고, 죽었을 겁니다. 재정적인 타격도 입었을 겁니다. 간절하게 병이 낫기를 기도했을 거예요, 전염병이 사라지기를 기도했을 겁니다. 저도 아침기도마다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바이러스는 여전하고,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은 아직 요원합니다. 기도하면 척척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거나,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걸까요?
사람들은 믿음대로 현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믿음과 현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대로 100%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사실이지만 확실한 거지만, 현실은 아닌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처럼 현실이 막막할 때, 이런 현실의 냉엄함 속에서 과연 우리가 잘 버텨나갈 수 있을까요? 끝까지 우리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 고민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가장 큰 고민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고난 당하고 싶어 믿음을 갖는 이들이 아마도 그때나 지금이나 없을 겁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이 너무도 좋아서 믿은 거죠. 복음 안에서 선포된 것들이 사실이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확고한 믿음으로 자리 잡고, 그 약속이 너무도 강력해서 어떤 위협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순교를 불사한 이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여기에서 이들이 겪는 고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두 가지 정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와 천주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제사를 거부했어요, 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섬긴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아마도 로마제국 곳곳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려다가 개인적인 고난을 겪었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입니다. 주후 64년 7월 이후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이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후 64년 7월 19일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나죠. 이로 인해 로마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황제는 대형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이로 인해 극심한 박해가 시작돼요.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참으로 긴 세월 박해가 지속됩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비참하게 순교를 하죠.
이렇게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될 무렵, 아니면 시작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서신을 보냅니다. 편지를 통해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이기도록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한 겁니다.
실은 박해가 베드로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네로 박해 시기에 바울과 함께 순교합니다. 바울은 목베임을 당하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순교합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피해 도망쳤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 실패 이후에 그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로 고난받는 모든 성도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이 무엇일까요? 산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죄인 된 인간으로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실은 그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산 소망을 갖습니다. 산 소망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계시지 않는 것은 곧 소망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산 소망이심을 믿으십시오. 소망이신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 분 안에 모든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게 산 소망 가운데 있으니 삶이 요동치지 않습니다.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유업을 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유업은 어떤 유업일까요? 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은 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유한합니다. 지상의 것들을 바라는 이들은 이런 유한한 것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죽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리를 든든하게 하여줄 영원한 기업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민수기 18:20, 시16:5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의 분깃이 되어주시고, 시인이 자신의 기업이신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영원한 기업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나의 기업이심을 믿는다면, 그래서 산 소망이시고, 영원한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가치를 볼 수 없기에 사람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합니다.
이제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돌리십시오. 물론 이 땅의 것들도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소중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요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요 진짜는 하늘에 있습니다.
더 이상 허망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거기에서 삶의 부요함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5절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파루시아,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주의 재림이 임하기 전 개인의 종말인 죽음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얻는 것입니다. 엔 크리스토가 아닌 그 분 밖에 있으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며, 구원의 인치심까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마 28:20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이처럼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고난과 시험, 위기에 직면했을 때입니다.
거기에서 반드시 구별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태도입니다.
6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아프고, 힘든데 처음부터 난 괜찮아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프면 신음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할 수 있고, 잠간 근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더는 엇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땅의 것만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이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한숨만 나오는 거죠. 현실 앞에서 걱정과 불안, 두려움뿐입니다.
하지만 가치추구의 차원이 달라지면, 7-8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하늘의 영광, 존귀, 칭찬을 추구한다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 진리를 깨달았고, 소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이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셨습니까? 구원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세요. 더는 한눈팔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의 산 소망이십니다. 영원한 기업이십니다. 완전한 보호자이십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믿음과 현실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아무리 달라도, 시험과 고난을 이겨내며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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