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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권리와 의무: 벧전 2장 1-10절

by 최수근 2020. 5. 19.

2020년 5월 17일 주일예배

[권리와 의무: 벧전 21-1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잠잠해지는 듯하다가 이태원 클럽 발 코로나 확산으로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초유의 사태를 보면서 권리와 의무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은 자기 권리는 큰 목소리로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의무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리와 의무의 관계는 빛과 그림자와 같습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언제나 같이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리와 의무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라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입니다. 자녀로서의 놀라운 권리를 부여받은 거죠. 나아가 베드로전서 29절 말씀을 보면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사건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안 되는데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10절에서 말씀하셨듯이 긍휼을 얻지 못하던 자에서 긍휼을 얻은 자가 된 것이지요. 주님의 긍휼을 3절에서는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주의 인자하심이 너무도 크고 놀랍기에 이런 선물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3절에서는 이것을 전제로 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는 넘치는 특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신 은혜를 경험하고 맛보고 누렸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며 명령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고 순종하여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비움과 채움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요소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저장 강박증이라는 병을 아십니까? 전 세계 인구 2-5% 가량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버리지 못합니다. 모으기만 합니다. 그러니 물건이 산더미로 쌓여 집 안에 발 디딜 틈조차 없게 됩니다. 비우지 못하면 우리 삶은 쓰레기장이 되는 겁니다. 일상의 삶에서도 비울 수 있고, 버릴 수 있어야 하듯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동일합니다. 버리지 못하면 건강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거듭나기 이전의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그 거듭남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17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우리 내면의 것이 순식간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없어진 것처럼 꼭꼭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할 영역이 드러나는 데로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절에서는 모든이라는 말을 쓰면서 버릴 품목에 대해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악독은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모든 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마음으로 생각으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행동이든 마음이든 그런 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만은 사람을 속이는 일입니다. 외식은 이중적인 삶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이죠.

비방하는 말은 남을 향해 무고히 중상모략하거나 악담을 의미합니다. 

이 문장을 요약하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로, 행동으로 판단으로 다른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19로 인해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쉽게 남을 비난합니다. 댓글로 상처를 줍니다. 이건 다른 사람도 죽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도 죽이는 행동입니다. 요한일서 3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것들이 옛사람의 영역이고, 마귀로부터 비롯되기에 그 끝은 사망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맛보아 안다면 이것을 버리라는 거에요. 맛보아 아는데,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실은 영생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 영원한 권리, 그 가치를 모르니까 그렇게 밖에 행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와 함께 비워 진 그 자리는 새로운 것, 즉 영적인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2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른 그 어느 책에도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수식어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먹어야 할 성경은 읽지 않고, 신앙 서적만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경건 서적들은 해석되고 적용된 텍스트입니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반대로 잘못 읽으면 믿음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말씀 자체를 읽어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신앙서적을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데 도움을 받는 거죠. 그러나 성경이 메인이 되어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거기에서부터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성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두 가지입니다. 신령한 집과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로 삼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레위기 1145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이를 통해 거룩한 교회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하는 자로 서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분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로마서 12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반적인 예전이 아닌 거룩한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 삶이 제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예요.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외식은 잠시 숨길 수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납니다. 문제는 혼자의 힘으로는 우리의 거룩함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로서의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세상의 유혹 앞에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강력한 연합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24절 하반 절의 말씀대로 언제나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모든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보배롭고 산 돌이신, 오늘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초석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감은 그 분과의 동행이며, 연합입니다.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거룩함의 일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영적 모습, 수준을 하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입니다. 택하신 자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놀랍고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요?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선포는 입으로 선포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유명한 몇 분의 선교사에 의해서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각 도에 흩어져서 민중 속으로 들어가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수 많은 선교사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렇게 삶에서 섬김으로 증거 하였기에 거기에 감동을 한 사람들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통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투영되고 있습니까? 그분을 날마다 삶으로 증거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의 인자하심으로 불러주셨고, 복음의 전도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놀라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그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 합당한 영적 수준을 위해 삶에서 거룩함을 훼손하고 있는 모든 악독, 모든 기만, 외식,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성령충만하십시오.

날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십시오. 그 분과 동행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함으로 세워져 갈 때, 세상은 우리가 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을 볼 것입니다.

그 역사가 일어날 때 저들이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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