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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가치를 아십니까? : 히브리서12장18-29절

by 최수근 2013. 9. 22.

2013년9월22일 주일설교동영상

[복음의 가치를 아십니까? 히브리서12장18-2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가치를 알지 못해

2010년 영국 런던 유스턴역에 한 샌드위치 가게에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씨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도난당했습니다. 1698년 만들어진 이 악기의 가치는 약120만 파운드, 한화로 20억 원 정도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이 악기를 훔친 존 모건이라는 사람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터넷 카페에서 명품 바이올린을 100파운드에 처분하려 했습니다. 120만 파운드가 고작 100파운드라니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얼마나 기분 나빴을까요? 다행히 이 바이올린은 몇 개월 전 불가리아 경찰에 의해 회수가 되어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가치를 형편없이 여긴다면 참 기분 나쁜 일입니다. 나는 분명 보석인데 세상 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사람 취급하면 마음이 참 억울합니다.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냈을 때도 똑똑한 나는 떨어지고, 붙은 사람들을 보면 나만 못한 이들이 대게 붙습니다. 나를 몰라주는 세상에 열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있고, 자신 안에 엄청난 보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가치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인간의 가치

그러기에 우리 자신의 가치는 물론 우리가 붙잡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믿음의 경주에 임하고 있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생활 이 자체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혹은 취미생활정도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언제 떠나도 후회함 없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가치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에 따른 정보가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존 모건이라는 자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단돈 100파운드에 팔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물론적인 가치로 평가하면 우리 인간은 별로 가치가 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인간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은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모르기에 하나님에 대해 오해했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쯤 되면 인간을 포기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선택하신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들을 이어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 인간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121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습니다. 그 약속이 이삭,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로 이어졌고, 그 약속의 이행을 위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해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죄인인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희생제사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대로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보자가 되어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써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오늘도 시내산에서의 언약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의 속죄함을 위해 매번 소와 양과 염소, 새를 잡아 그 피를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 창조하셨던 때처럼 인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으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신 겁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의 가치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복음의 은혜를 전하였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늘 깨닫게 하는 율법의 짐에 눌려있던 이들에게서 그 무거운 짐을 하나님은 벗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그러진 하나님의 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은혜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다시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를 받아본 교회공동체 성도들은 복음의 소식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면서도 새롭게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복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시내산 율법의 짐 아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부주의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누려야 할 복음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르는 영적인 무지함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두 언약의 산: 시내산과 시온산

이에 하나님은 옛 언약을 대표하는 시내산과 새 언약을 대표하는 시온산, 두 언약의 산에 대한 말씀을 통해 새로운 언약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오고 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이 땅에서 가치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하는 내용은 먼저 접근성의 문제를 다룹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부여된 산이었으므로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시내산에 들어가려하면 짐승은 물론 사람이라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옛 계약 아래서 인간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만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한번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시내산과 대조적으로 시온산은 달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살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담대함과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에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명령을 받습니다. 4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이렇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기초로 한 계약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유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복음의 약속을 기초로 한 계약은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세워주었습니다.

우리가 다다른 곳은 시온산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히브리서를 읽는 교회공동체로 하여금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율법이 지배하는 시내산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시온산임을 밝혀주십니다. 18-19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새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모든 이들이 이른 곳은 은혜의 산, 시온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피가 뿌려진 곳,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히브리 공동체 안에 여러 성도들이 서 있는 곳은 여전히 율법의 범주 안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우리의 삶을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지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 자기의 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 애를 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옛 언약의 자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히브리 공동체를 자각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참으로 잘못된 위치에 서 있지 말라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곧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에 따르는 더 큰 복음의 은혜를 통해 자기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통해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더 위대한 사랑, 은혜, 상태, 특권을 가지면 더 큰 책임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

먼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25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결국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그들은 피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을 통해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자명하게 들어나게 됩니다.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계시를 영적인 태만함으로 간과하고 새 언약의 복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들통이 날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가 아닌 거짓된 것을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

하나님은 믿음의 백성들이 소유한 가치가 영원한 가치임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허무한 가치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다 무너져버릴 겁니다. 26-27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그러나 영원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꾹 마지막 심판 때가 아니라도 거짓된 것, 무너질 것들은 결국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 무엇을 쌓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쓸모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살았던 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의 확실함은 우리가 그 어떤 어려움의 과정에서도 신실함으로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에 임할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자

이처럼 영원한 나라에 대한 확신과 위로를 주는 이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가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28a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함으로 나아가 예배드리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 은혜의 자리로 늘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의 체험 없이는 복음의 가치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없고, 더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는 일은 성도의 감사와 직결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라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28b“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두 가지 다른 측면이 요구됩니다.

먼저 하나님을경건함과 두려움으로섬기라 말씀하셨습니다. 은혜가 중심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함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을 예우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을 지닌 자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 또는 유혹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을 지켜냅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예우하니 그 분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을기쁘시게섬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섬김은 하나님이 외면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깁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으로 다가오셨지만, 우리는 그 분의 방법을 따라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과 코드가 맞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 분을 기쁘게 섬겨야 합니까?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멸하는 불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모든 것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순종과 예배를 통해 우리가 고백한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에 분주하기보단 믿음의 경주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부주의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적인 유산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여기고, 쉽게 상실하는 이들은 결코 완주하지 못합니다. 결국 낙오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하며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이들입니다. 복음 안에서 굉장한 존재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현장에서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매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뭔가 더 잘하려고 애를 쓰는 일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구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에서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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