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9월29일 주일설교문
[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 히13장1-8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은혜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얽매여 사는 이들이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이들입니다. 게다가 우리 삶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은혜이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자 은혜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손을 우리에게 먼저 내밀어주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어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불러주심에 우리는 응답하고 여기 선 것입니다.
거룩한 산제사
그 다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받은 이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측면을 하나님께 대한 헌신된 봉사의 표현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매 단계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열매들로 드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원하십니다.
로마서12장1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은혜를 받은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영적 예배가 우리에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15장5절에서 예수님은“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원천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안에 있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3장1-21절까지의 말씀도 히브리서 12장28절에서“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는 권면을 구체화하는 실제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은 형제자매에 대한 섬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1절에“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형제는 같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지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가페가 아니라 필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유의 사랑을 강조하지 않고, 수평적인 사랑, 형제사랑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희생, 헌신, 섬김 등의 아가페적인 사랑이라면 사람들은 다 도망갑니다. 얼마나 부담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사실은 그것조차도 세상은 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형제사랑은 온정, 관심, 호의, 동정 등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에는 무관심, 자기만족, 이기적인 마음, 관심의 부족, 존중하지 않는 행동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들이야말로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와 같은 요소들을 먼저 우리 안에서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체를 향한 마음이 길게 갈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에서 하나님은“그것을 계속하라. 그것을 멈추지 말라”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동사 시제를 사용함으로 형제사랑에 대한 지속적인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제 사랑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가 이벤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거룩한 삶으로 드려지는 산제사가 되려면 우리 삶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지속적이고도 거룩한 향이 주님께 올라갈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렇게 교회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의 짐을 지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 섬김의 영역이 교회 공동체를 넘어서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집과 교회 안으로만 파고들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 울타리 내에서만 편안하게 적용시키기가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영역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그 섬김과 사랑과 자비심과 동정심이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 안에,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을 넘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영역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 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일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문을 열라고 하나님은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복음 증거의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사랑은 우리와 하나님의 온전한 관계에서 흘러나오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방법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생각하라
더욱이 3절 말씀에선“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갇힌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 때문에 박해와 매질과 상처와 거부를 당하고 있던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오늘 날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온갖 종류의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아파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라는 요청입니다. 힘들어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저들의 선한 이웃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렇게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회복은 민감하고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영역이 부실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쁨으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의 회복
이와 같이 타자와의 관계를 말씀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요청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유일한 덕목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과 함께 존재해야만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프랜시스 쉐퍼는 강력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이중의 임무를 지닌다.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균형 있게 보여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단체가 행하는 일은 어떤 것이든 그들을 주시하는 세상에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실물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서투른 모방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고, 하나님의 얼굴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 거룩함은 우리를 거룩하지 못한 세상과 성별시키는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5절을 보면, 사람들의 성적인 타락과 결혼의 신성함에 대한 무시, 그리고 돈에 대한 탐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성별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결혼을 귀히 여기라
히브리서를 받아보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의 왜곡과 탐닉이 만연해 있는 부패한 사회에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부정은 한 때 대중들에 의해 비난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소설, 드라마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어쩌면 성의 왜곡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 결혼식에서 이런 말들이 사라졌습니다. “검은머리 팥 뿌리 될 때까지” “죽음이 두 사람을 갈아놓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이와 같이 성의 경계가 허무하게 무너진 세속화 시대에도 거룩하게 구별됨을 요청하십니다. 이 영역이 구별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미 없는 허수아비로 예배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4절“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결혼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이며, 교회와 사회의 초석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음란하게 깨뜨리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돈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질병 역시 성적인 타락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심각한 질병입니다. 세상의 문화전체가 우리에게 번영을 추구하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점점 더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도 이런 유의 메시지가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성도들 또한 물질의 복을 최우선적으로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나 또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우리에게 돈은 필요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버립니다. 돈에 애정을 품거나 돈을 늘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을 이기는 길은 자족하는 마음뿐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만족함으로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심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안도감을 더 가질 수 있기 위해 충분한 돈을 모으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세상의 가치관을 갖고는 결코 만족할 수도 없고, 안도감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보았자 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변함없는 안도감과 평안을 줄 수 있는 토대 위에 우리를 세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무한신뢰입니다. 5절b“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모세가 차지했던 지위를 떠맡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어려움과 곤란함에 빠진 채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 개인을 향한 약속을 오늘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약속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함께 하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로 하여금 우리를 안심할 수 있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 분명한 약속을 붙잡고 간다면 우리는 어떤 역경에 직면해서도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그 어떤 것도 우리를 힘들게 만들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한 손을 사랑으로 잡아주실 때, 우리는 꽉 움켜진 나머지 한 손을 풀고 움켜쥐고 의지했던 세상의 것들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유 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함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및 도움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를 더욱 강하고 거룩하게 만들어갑니다.
믿음을 본받으라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 앞에 서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거룩함을 더욱 다지기를 원하십니다. 7절“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우리들은 전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던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갔는지, 그들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기뻐하셨는지를 보면서 그들이 걸어갔던 거룩함의 길을 동일하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개척자라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렇게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모든 세대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와 가르침은 현대나 그 이후의 사람에게 결코 부적절하지 않습니다.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간혹 세상은 불만을 갖습니다. “세상은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 반면에 기독교의 신조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불만에 대해 우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8절에“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목적과 목표를 요구하십니다.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진리와 사랑과 정결을 오늘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사랑과 정결을 통해 오늘 우리는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고, 이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우리 예배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서 변함없이 동일한 예수님이시기에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우리는 확신 있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을 이루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삶의 열매로 하나님께 예배드립시다. 하나님께서 기뻐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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