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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영문밖으로 예수에게 나아가자! 히13장9-16절

by 최수근 2013. 10. 6.

2013년10월6일 주일설교문

[ 영문밖으로 예수에게 나아가자! 히13장9-16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복음과 포스트모더니즘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복음은 당대의 언어와 문화, 철학 안에서 전달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헬라적 사상 안에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중세에는 스콜라 철학의 사변적인 영향 하에서 전달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계몽시대에는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과 함께 철저히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상황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가 추구하던 절대 진리, 권위 체계를 반대하고 해체함으로써 계몽주의시대에 고안되어 현대정신의 기초를 형성했던 원리들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절대성에 대한 신앙이 몰락하고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혼이나 혼외정사, 동성애 같은 과거의 죄악들이 더 이상 정죄되지 않고 관용되는 윤리적 상대주의가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절대 이성에 근거한 보편적 진리가 부정되고, 한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절대 종교도 부정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쉽지 않은 세상에서 신앙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자신도 이와 같은 세계관에 조금씩 노출되면서 신앙의 변형이 이루어 지기도합니다. 상당한 타협들이 이루지고 있습니다하지만 복음은 그 숱한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그 참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을 해체하고 이성의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조합해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30년 전 신학공부를 시작 할 때만 해도 참 진리가 뭔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온통 벌거벗겨질 태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런 시도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오랜 역사를 통해서 복음의 저력을 볼 수 있지만 초대교회는 상황이 또 다릅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의 영향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과 다른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도 유대교의 영향 안에서 복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복음의 핵심키워드인 믿음에 율법적인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는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옛 율법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할례를 받고, 음식정결법을 지키고 그렇게 복음이 왜곡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편지를 받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이를 위해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다른 교훈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 길은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 은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 다른 어떤 길을 찾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다른 길은 결단코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길이 있다고 간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길은 우리의 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다양한 종교들이 세상 사조의 흐름에 따라 서로 공생을 모색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유독 기독교만이 배타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금방 무너질 인간적인 독선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선포하신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만일 이것이 유한한 한 인간의 독선이었다면 지난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길로 왔겠습니까? 어떻게 생명을 얻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수많은 이들이 내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의 제단, 십자가 

바울은 10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드려진 십자가의 제단입니다. 옛 성소의 제단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제단은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이들이지, 여전히 율법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그 분과 동일시되는 성만찬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에,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개의 전통을 혼합하여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제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레위기 1627절에서 따온 것으로 희생제물의 피는 성소 안에서 뿌려지고 그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졌다는 것입니다.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따온 것으로 희생제물이 성문 밖에서 불태워졌던 것처럼 예수님도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입니다.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이와 같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피의 효력은 우리의 근본적인 죄를 깨끗하게 하셔서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 없게 하셨습니다. 옛 성소 제단에서 매년 드려야 했던 희생 제사를 그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제단을 필요 없게 하신 것입니다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십자가의 제단이 우리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하셨고, 그 제단 앞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분이 겪으신 동일한 고초를 겪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그리고 진정으로 연합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 자신이 갈보리에서 지셨던 꼭 같은 학대와 혹사, 박해와 같은 그의 치욕를 받아들인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기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구별됨이라는 상흔입니다. 사람들이 영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있을 때, 영문 밖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몸에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간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조와 타협하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영구한 도성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근거가 우린 분명합니다. 14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우리가 잡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변하고,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결코 흔들림이 없는, 요동치지 않는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건설하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교훈들도, 진리라고 외치는 시대사조들도, 이 땅의 안락함도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무너질 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절대 진리를 해체한다고 해도, 절대권위를 부정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될 분도, 해체될 분도 아닙니다 

찬송의 제사

그러기에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지난 믿음의 사람들이 행했던 것처럼 십자가 은혜의 제단 앞에서 우리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전하는 것입니다. 15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삶을 살고, 그와 함께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도록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의 나팔을 부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오직 신앙적인 일에만 관여해야 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전문적인 기독교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고 바울이 골로새서 317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땅의 것들에 마음을 두게 되고, 결국 하늘의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고, 영적인 혜택을 누리도록 하셨지만 이 땅에 흔들리는 것들, 무너질 것들을 붙잡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의 제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고, 우리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기를 하나님은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섬김과 희생의 길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 그 뒤를 따르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요, 최고의 제사가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러 다른 교훈들이 판치고 있는, 어찌 보면 기독교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전도하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고,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지 않습니다. 더욱 우리를 옥죄어 올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려 달려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처럼 우리 또한 산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으로 나간 예수 그리스도를 뒤 따른 다는 것은 이전 삶의 방식들을 완전히 깨트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의 단면을 잘 보여 주는 증거가 됩니다 

바울은 영문 안에서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잘못된 도성에 정착하려 한다고 질책하였습니다. 우리가 참 제자라면 근심과 걱정이 아니라 담대함과 기쁨으로 영문을 나서야 합니다. 내가 구축하고자 하는 영문 안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다른 것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무엇을 말하든 진실과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어떠한 희생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서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 또한 작은 예수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기쁘게 흠향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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