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6월29일 주일설교문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장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분하다!!
브라질 월드컵이 그간 조별리그를 마치고, 16강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승리한 자들은 기쁨을 만끽하지만 이기지 못한 자들은 눈물 흘리고, 허탈한 마음에 그라운드에 주저앉거나 드러눕습니다.
승리하지 못한 선수들이 인터뷰를 할 때 보면 준비한 대로 최선을 다해 이기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고, 응원한 국민들에게 죄송함을 피력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일본 선수들을 보면 져서‘분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물론 분하다고 하는 일본어 ‘쿠야시’라는 말이 우리말의 ‘분하다’와 똑 같은 의미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게 진짜 사람들의 마음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방에게 져서 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내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 축구가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게 분하십니까? 그걸 분해하다가 비극으로 끝난 일도 있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한 콜롬비아는 예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큰 기대를 했는데, 수비수 에스코바르의 자살골로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감독과 대부분의 선수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귀국하지 않았는데, 에스코바르는 죄책감으로 홀로 귀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클럽에서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콜롬비아 언론은 “나라 전체의 자살골”이라고 비통해했습니다.
위로가 없는 세상
이건 비단 콜롬비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우리나라 SNS도 난리가 났습니다. 분노의 댓글들이 홍명보감독을 향해, 박주영선수를 향해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힘들어할 사람들인데, 오히려 비난보다는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데 봐주질 않습니다. 정녕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는 마음이 타인을 향한 분노와 삭막함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걸까요?
더군다나 브라질 월드컵에 시선이 집중되는 동안 세월호의 슬픔이 잊혀 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단원고 2학년 생존학생들이 그간의 집단치료를 마치고 처음으로 학교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하는 말 때문에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학생들은 “우리 모두는 이제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며 “그저 평범한 18세 소년·소녀로 대해 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헌데 이 아이들에게 ‘친구들 배신하고 너만 살아 나와서 좋으냐’는 말로 비수를 꽂는 이들도 있었고, 또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웃고 싶을 때도 있지만, 공차며 신나게 뛰어놀고도 싶지만 그 모습을 보고 오해할까 봐 웃지도 못하고 뛰어보지도 못한 그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직도 이 땅이 함께 슬퍼하지 못하고, 함께 위로하지 못하는 그리 성숙하지 못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실제적인 감정을 나눌 때 우리는 더 깊고 풍성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헌신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12장15절에서“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했습니다.
위로의 메시아
아직도 이 땅에는 억울한 죽음, 억울한 일들을 당하고서도 그 비통함을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런 자들을 품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상생의 삶을 살아야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길을 우리 예수님이 보여주셨고, 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자, 고통 받고 있는 자, 가난한 자, 죄 가운데 있는 자, 억울한 사연이 있는 자들을 위한 놀라운 소식, 복음의 소식을 갖고 위로의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사61장1-3절에서 메시아가 행하실 일을 전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참으로 위로가 절실한 사람들을 주목하셨고, 세상에서 그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음에 슬퍼하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복을 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선언하시는 복은 어찌 보면 세상의 관점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자들이라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로부터는 정죄 받고 비난받았을 터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그들이 복이 있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그 당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종교 지도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부족한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경건한 자들이 차지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
두 번째 말씀하신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5장4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대체 애통하는 자가 어떻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비통함에 빠져 슬피 우는 자들을 누가 위로해준다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사용된“애통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펜둔테스의 원형인“펜데오”는 심히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으로 삭일 수 없어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극심한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입니다.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애통해 하게 될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상실함으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상실이 재정적인 것 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 사회적 신분,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애통함은 단순히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인 낙심과 실패와 좌절, 죽음에 대한 슬픔과 비통함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위로의 손길을 내미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애통은 바로 영적인 애통함입니다. 이 애통은 외부의 문제와 내부의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외부에 대한 애통은 세상의 불의함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유대의 상황을 보면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만 유리하게 짜인 체제의 불의함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부나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빚을 갚기 위해 가족을 노예로 파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불의함을 보면서 분해하는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이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면서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시편119:136에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니이다”고백을 한 이들이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마땅히 건전한 사회적 양심을 강조해야 합니다. 사회적 양심을 강조하지 않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 분노하고 대적하기보다는 먼저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문제들을 안고 애통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봅니다. 그는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의 불의함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한 것은 개인적인 애통으로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반응입니다. 본문을 이렇게 해석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과 철저하게 타락한 자신을 깨닫고 그로 인해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위로해주시리라는 약속이 성립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외부적인 문제에 대한 반응만이라면 몇몇 특별한 사람만 위로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로 인한 애통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세상의 불의함에 대해서 눈물을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과 죄악을 느낄 때 그는 자신의 죄악과 무능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기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원수가 되었던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자기 과신의 원인이 되었던 독선적인 자신의 태도를 바라보면서, 그것들로 인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지난날의 죄에 대해 겸손하게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참으로 애통해하며 슬퍼한 적이 있습니까?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엉엉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슬픔은 다른 사람의 어려운 상황과 슬픔에 대해서 더욱 민감한 마음을 갖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절망감,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생각으로 인한 비통함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동기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으로 인한 애통함이 없는 한 진정으로 절대자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애통함을 마음에 주시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만날 수 있으니 이게 바로 복입니다. 마음의 완악함으로 그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분명한 것은 우리의 애통함이 소망 없는 사람들의 슬픔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함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결코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이야기의 끝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어느 곳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부유한 자와 명랑한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애통하는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슬픔과 비통함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위로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런 상태에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파라클레데손타이” “위로를 받을”이라는 동사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소위 신적인 수동형 동사입니다. 이것은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가 이 땅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임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애절한 슬픔은 철저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케 됨으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시제는 미래형으로 되어 있어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미래적인 위로인 것을 보여줍니다. 종말의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참 목자가 되어주시고, 하나님께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심으로 마지막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물론 그와 같은 종말론적인 위로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실적인 역경 가운데 있고, 우리 내면의 죄와 싸우고 있기에 끊임없이 애통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일회적인 애통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 우리들을 지속적으로 이 땅에서 위로해 주실 겁니다.
반면에 슬퍼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었습니다. 누가복음6장25절“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나서 성전에 제물을 가져옵니다. 불의를 계속 저지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제물이 그들의 죄를 덮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과 죄로 인해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들, 진정으로 눈물 흘리며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 애통함이 없으면 우리의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진정한 회개의 슬픔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영적 파탄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에 대해 정말로 슬퍼해야 합니다. “세상은 정말 엉망진창이야.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그 어떤 심각한 부담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슬퍼하지 않으며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지금의 즐거움만을 쫓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게 당장은 기쁘고 즐거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영적 성취에 대한 자만을 버리고,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며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을 보면서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위로를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시126편5절“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삶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그 나라를 개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더 강화된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표현입니다. 앞으로 팔복을 계속 말씀드리겠지만 팔복의 개별적인 특성들은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삶을 살려고 함으로써 배우거나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에서 성령이 이루어주시는 온전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와 같은 영적인 애통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만져주시도록,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구석들을 조명해주시어 죄가 밝히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이 드러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우리의 마음이 위로 받고, 이 땅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애통함에서부터입니다. 그리고 이 애통하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품고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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