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주일예배설교원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마5장5절

by 최수근 2014. 7. 6.

2014년7월6일 주일설교문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마5장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세상은 누구를 선호하는가?

요즘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인적성 시험을 봅니다. 이 시험은 응시자가 인성검사와 적성검사를 통해 그 기업에 맞는 사람인지 체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정확하게 사람을 분별 해내는 덴 한계가 있지만, 많은 기업들이 인적성 시험을 통해 사람들을 채용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사권자라면 이런 시험을 통해 어떤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능력 있고, 성품이 좋다면 당연히 그런 사람을 뽑을 겁니다. 그런데 능력은 있지만 성품이 좀 모난 사람과 능력은 없지만 성품이 좋은 사람이 있다면 이 둘 중에 여러분은 누구를 뽑겠습니까 

요즘 같이 강함, 추진력, 결단력 등이 최고의 덕목으로 꼽히는 시대에 과연 온유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을 약하고 비굴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늘 양보해야 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지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함부로 대하기 일쑤입니다 

반면에 세상에는 온유함을 지지하는 이들 또한 있어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온유는 인간이 가져야 할 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온유함이 지나친 분노와 전혀 분노하지 못하는 무능력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쓸데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서, 옳은 사람을 위해서, 옳은 순간에 적절한 시간동안 분노하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묘사했습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온유한 자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시경에 보면 온유돈후라는 말이 나옵니다. 온유돈후는 성정이 온화하고 사람을 잘 이해하며 너그럽고 후덕함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이런 품성을 지닌 자가 있을 때 타인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을 잘 이해하여 상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를 보면 온유돈후를 잃어버렸습니다. 남들을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남들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또 그와 같은 자들이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이 땅의 가치와 상반된 하늘의 가치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에 이어서 이 땅의 온유한 자들을 향하여 세 번째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왜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겁니까? 실은 현세에서 세상을 소유하는 자들은 결코 온유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온유한자가 복이 있고,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도를 갖고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걸까요? 솔직히 말해 세상에서 뭔가를 소유하기 위해선 능력도 있어야 하고, 자기 확신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강해야 합니다. 온순하고 순박해가지곤 당하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발 빠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자들은 늘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조금 갖고 있는 것까지 잃어버리곤 합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오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유대 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세상의 논리가 장악하고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그들이 결국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과는 정반대되는 길을 보여주시며 그 길을 걸어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외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시편3711절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그 순간 시편37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점에서 마태복음 55절은 사회학적인 해석이나 인간의 성품과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37편에서 드러나고 있는 말씀 속에서 온유한 자의 모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분히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돈후의 품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분노와 불평, 시기를 멈추라

시편37편은 불의한 자들의 악행과 정직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사는 불의한 자들의 번성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불평하거나 그들의 형통함을 시기하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을 보면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7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말씀합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에 부딪쳐보면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시편37편의 시인의 상황처럼 우리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갑의 횡포가 상상을 초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서러움에 나도 한 번 갑이 되어보고자 정직하게 성실하게 해보지만 저들보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에 전념해보지만 승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년퇴직을 바라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최대한 준만큼 아니 그 이상을 뽑아먹으려는 사주들, 말단 직원의 아이디어를 마치 자기 것처럼 보고하는 상사, 나보다 절대적으로 못한 것 같은데, 정말 성격도 못되어먹었는데 뒷거래로 잘 나가는 사람들, 있는 돈 굴려 더 큰 돈 만들어가는 이들, 이런 꼴들을 바라볼 때 정말 배도 아프고 화도 납니다. 거기에 비해 왜 자신은 그렇게 초라한지? 그런데 그런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의 형통함을 시기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말고, 화도 내지 말라고 하시니 우리보고 어찌 살라는 말씀인지? 왜 하나님은 우리를 물러터진 사람처럼 만드시려는 걸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이 잘 나감을 보고, 부러워하고, 불평하고, 분을 내다보면 거기로 부터 또 다른 악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말씀하였습니다. 온유함으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악은 흘러갈 것이고, 어느 순간 우리도 그 속에 빨려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잠잠히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앞에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말씀합니다. 이 땅의 불의함으로 인한 번영은 끝이 분명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마지막이 오기 때문입니다. 영원할 것 같던 불의함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어느 순간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행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온유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인내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마냥 그런 날이 올까 기대하며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이것은 세상과는 다른 가치와 목표와 수단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지금 보여 지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을 믿고 자신은 자신이 가야하는 의의 길을 올곧게 가는 것이 온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단지 외적으로 부드러운 태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신뢰함에서 오는 부드러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면 짜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니까.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온유한 자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삶에 피곤함이 있어도 하늘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얄팍한 인간적인 수단과 능력, 인맥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의지하다 보면 힘들어지고 우리 안에서 결국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온유한 자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기뻐하기에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온유한 자는 그냥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물러터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 불평도, 시기도, 분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통해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되고, 언제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게 됩니다. 이 삶의 자세가 사람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분명히 그 의지함에 대해 보상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마침내 정오의 햇빛처럼 높여주실 것입니다. 온유함은 끝이 아름답습니다. 어둠에 가리어졌던 그들의 삶이. 불의함에 억눌려 있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을 차지하는 자 

예수님은 이처럼 온유한 자들이 복 있는 자임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이야말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은 과거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배려로 인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듯이, 온유한 자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불의한 부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땅을 다 빼앗아 온유한 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그런 혁명가가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 대한 보상으로 땅을 차지할 수 있는 현세적인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보다 근본적인 성취는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축복의 선언입니다. 여기에서 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온유한 자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 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약속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1: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러분 받을 상급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와 같은 영원을 향한 소망을 통해 온유한 자들로 하여금 생의 목표를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썩어질 것에 꽂혀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을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작은 보상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는 보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모든 태도를 결정 짖고 삶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하나님은 결코 방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온유를 배우라 

그러나 이 온유함의 삶은 우리 안에서 그냥 이루어지는 덕목이 아닙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온유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는 미덕으로 보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헬라의 사상처럼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이와 같은 온유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주님을 통해 어떤 부당한 환경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온유함은 그리스도의 관용과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고후101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41-2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관용을 본받아 외부로부터 닥치는 억압과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거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영적 평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클레이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를 해석하면서분노해야 할 때 항상 분노하며 분노해서는 안 될 때 결단코 분노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온유와는 다릅니다. 온유함이 겉으로는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인함과 모든 대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결국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세 번째 복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늘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함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소중한 것을 영원히 얻도록 하기 위해, 지금 작은 것들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길은 세상의 길과 다른 자기부인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설사 아무것도 없는 자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또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포기가 오히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믿고 내려놓음을 통해 이곳에서 안식의 기쁨을 누릴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온유함을 배움으로써 이와 같은 하늘의 권세와 하늘의 복을 누립시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