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3월30일 주일설교문
[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까? 로마서6장1-14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변함없는 우리
슈렉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보면 성탑에 갇혀 사는 피오나 공주가 나옵니다. 피오나 공주는 요정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본래의 아름다운 얼굴로, 밤에는 흉한 괴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슈렉이 마법에서 풀려나게 합니다. 마침내 마법이 풀려 미녀로 돌아오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본래의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오는 듯 하더니 다시 흉한 얼굴로 되돌아가서 마법이 풀려버린 것입니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대가 무너져버렸으니... 그 순간 여러분이 피오나 공주라면 마음이 어땠을까요?
구원받은 이후 사람들은 마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저주받은 인생이 아닌 본래 아름답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회복을 꿈꿉니다. 고후5장17절에서도“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구원받은 우리를 향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멋지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는 재창조된 삶에 대한 기대를 갖습니다. 거룩한 삶, 우아한 삶, 이타적인 삶, 시선이 하늘에 고정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그러나 지금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구원받기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분명 달라지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을 살고 있다면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정말 잘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할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면, 또 마음의 상태도 평안에 이르지 못하고, 그 날의 상황에 따라 들쑥날쑥하고 있다면, 반복적이거나 충동적인 죄로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가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한다고 하셨지만, 우리 주변을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로 인해 힘들어하고, 죄로 인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저주가 풀렸음에도 피오나 공주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가 본래의 거룩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요? 그 일이 그리도 어려운 것입니까? 평생 이렇게 죄로 인한 불편함을 갖고 산다면 이것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복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이토록 말씀과 현실 사이에 큰 갭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보다 한층 더 심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가 지나쳐 방종으로 흘러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죄를 짓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회개하고 또 그 다음 날 보면 죄의 자리에 가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넘친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이건 프랑스의 회의주의자 볼테르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할 일이니까?”이건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향해 외치셨습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자리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죄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반문을 합니다. “너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고 회개하고 반복되는 일이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누리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문제는 앎에 대한 문제입니다.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삶에서 바르게 적용하고 있다면 방종과 방황이 아닌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성경으로 기록된 이유입니다. 제대로 알고 믿고 생명을 얻으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잘못된 복음의 지식에 빠져 있는 자들을 향하여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2절“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까?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죽음은 지금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몸이 죽었으니 이전에 해오던 습관적인 행동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뭐라고 말하면 반응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죽은 시신을 붙잡고 아무리 하소연하고, 울부짖고 해도 미동조차하지 않습니다. 설령 욕을 해보세요. 살아있다면 버럭 화를 내겠지만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죽었으니까요!
여기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그간에 죄의 지배를 받아오던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가 우리를 쥐락펴락 할 수 없는 거예요. 바울은 이처럼 죽음의 실체를 통해 그렇게 죄에 대해 죽었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죄 가운데 더 살 수 있겠니?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하여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습관적으로 거하고, 죄의 지배를 받고 산다면 이것은 성도들이 걸어가고 있는 믿음의 여정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데이터로 작동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와 같다고나 할까요? 십자가 이후 세력을 상실한 마귀가‘속임수’라고 하는 악성 바이러스로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임수란 뭡니까? 죄에 대한 충동이 우리 안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거기에 감염되면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믿게 되는 것예요. 복음과는 정반대로 가버립니다.
이것을 감지한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어 할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 그들의 잘못 세팅된 복음의 질서를 바로잡아주고자 시도를 합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도록 복음의 핵심을 전개해갑니다. 믿음의 길에서 정확한 복음의 지식, 그것도 풀 버전으로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편적인 지식은 우리 믿음의 건강성을 해칩니다. 또한 방향과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
우리가 알아야 할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초대교회 당시 행하고 있던 세례 의식을 예로 들면서 3절에서 성도들이 알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 당시 세례는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행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 히 침례였습니다. 세례 받는 이들은 물속에 푹 잠겼다가 다시 올라와야 합니다. 그 점에서 세례란 물속에 잠길 때 옛 사람은 죽고, 다시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언약의 예식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는 사건도 이와 같은 이유로 세례의 사건으로 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이 세례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아이덴티파이 되는 사건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4절a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되었습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망이 다시금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동참하게 하신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죄에 대해 살지 말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4절b“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세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의의 영역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그 삶을 추구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심으로 이루어 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까? 확실하게 이것을 믿고 지금 가고 계시는 것입니까?
공소권 없음
바울은 로마서 6장6절에서 다시 한 번 성도들이 알아야 할 진리를 확인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인이 살아있는 한은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요. 하지만 일단 죄인이 죽으면 그 죄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범법 행위로 피의자 조사를 받다가도 이 사람이 죽게 되면 공소권 없음으로 조사가 끝납니다. 처벌도 없습니다. 죄를 더 이상 물을 수 있는 상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는 척 하는 행위로는 모면할 수 없습니다. 진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 죽으면 공소권 없음을 넘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의 선물을 주시는 거예요. 7절“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의 문제는 우리의 힘만으로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일을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의 약속을 알고, 그것을 신뢰함으로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라
그래서 바울은 이 진리를 알았으면 복음의 진리대로 믿고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제부터 죄에 대해선 죽은 자로, 오직 하나님 앞에선 산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그럴까 의심하지 말고 믿고 실행해보라는 것입니다. 11절“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다’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그건 착각입니다.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을 사실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이 진리이고, 그 말씀대로 의지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바로 오늘 나의 사건이며, 이 혜택을 내가 고스란히 지금 이곳에서도 누리고 있음을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대해 살아 있는 자가 아닙니다죽은 자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입니다. 이 약속을 지금 나의 실재로 여기고 더 이상 마귀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냐 반문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여기고 수용해야합니다. 그것은 바른 믿음의 지식이 우리를 확고하게 세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서 6장1-11절의 말씀을 통해 볼 때 우리가 계속해서 죄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이 약속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도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죄에 대해 죽었다고 해도, 여전히 죄에 대하여 살아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다고 하였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에게 속고 있으면 끊임없이 거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와 함께 그 약속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특별한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난 아닌가?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약속이요 보장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죄 앞에 죽은 자로 설 수 있습니다.
떠나라
물론 재림 이전 시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죽을 몸과 몸의 사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완전히 정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원칙적으로 죄의 세력을 극복했지만 재림 이전 시기에 아직 죄의 세력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게 공략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이 성화의 과정이 만일 불확실한 전투라면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싸움은 불확실한 싸움이 아닙니다. 14절“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다 강력한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승리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죄가 더 이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약속이 우리 안에서 활성화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삶이 쉽지 않은 게 무슨 이유때문인지 아십니까? 말씀 따로 행동 따로 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활성화되어 우리의 생각과 모든 신경체계와 행동, 나아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살아있는 자로 순종하고 시작할 때,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죄에 대해 죽을 수 있고, 몸의 사욕을 거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2절“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죄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술, 담배 문화를 떠나고, 우상숭배를 떠나고, 오락 문화를 떠나고, 옛 친구, 옛 대화의 대상들을 떠나고, 옛날 읽었던 책들, 즐기던 문화를 떠나 새 문화, 영적인 문화, 거룩한 문화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본능에 이끌리는 데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이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 때문에 발칵 뒤집혀다는 보도를 전에 뉴스매체를 통해 본적이 있습니다. “첫눈이 오면 치맥이 딱이지” 하는 여주인공의 대사 한마디에 상하이 치킨 맥주 집에 3시간씩 줄을 서서 먹는 사람들!!! 여러분도 그런 말을 들으면 줄을 서고 싶은 충동이 막 일어나서 결국 그 일을 하고 맙니까? 이건 그냥 본능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본능적인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죄의 소리에 귀기울이다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동화되고 맙니다. 옛사람으로 회귀하여, 죄의 노예로 사는 겁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의의 무기로 드리라
하지만 떠나는 것만으로 죄의 문제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고,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래서 그 약속을 나의 것으로 여겼다면 새 생명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새 주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3절“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우리 자신을 내주었다면 이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드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부딪치게 되는 하나하나의 사례들을 통해서 죄의 공세들을 막아내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를 위해 쓰여 지도록 우리의 지체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손이 지난 날 불의의 병기로 드려졌다면 그 옛 사람의 손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 새 사람의 손으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눈, 발, 생각, 우리의 성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하나 장사지내고 새 사람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왜드려야 합니까?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주심을 통해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도록 하는 자리가 성만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기주심이라는 성만찬의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올려드릴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 위해 자신을 주셨던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어 줄 수 있는 선한 이웃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세례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거룩한 삶으로 회복될 수 있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는 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거룩하게 회복되지 않고선 교회가 교회다운 면모를 세워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람하는 세속화의 도전 앞에서 도덕적인 침체와 부패라는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가 거룩함의 회복 없이는 더 이상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의 사건을 통해 우리 삶의 주권이 반드시 교체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 말씀을 통해서 바울은 누누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는 한 매일 죄 앞에서 우리는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 주도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양하십시오. 나아가 우리 자신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우리 자신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주시고, 가장 적절하고도 강력한 의의 무기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마귀의 진영에 떨어지는 강력한 핵폭탄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로부터 거룩함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진리를 아십시오, 마귀의 속삭임을 차단하십시오. 진리가 바로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불의의 무기가 아닙니다. 의의 무기로 드려진 하나님의 구별된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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